모든 거짓말에는 사연이 있다
나는 양치기 소년이다. 마을 공동체에서 공동 투자해 기르는 양 100마리를 관리하는 게 내 일이다. 그리 어렵지는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조금 곤혹스럽기는 하지만 산 위로 올라가면 누구도 간섭하는 어른이 없어 맘 편히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건 매우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 손에서 지금까지 자라왔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도축을 도맡아서 처리해 항상 집안 가득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가축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이게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르겠다. 그 능력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를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정확히 몇 살 때부터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도살장에 끌려온 소가 옆에 있던 오리에게 말하는 것이 들리는 게 아닌가! “이봐! 오리, 너도 여기 냄새를 맡아서 눈치챘겠지만 저 문으로 들어가면 아마 더 이상 따사로운 햇볕을 보지 못할 거야. 지금 마음껏 기억해 두게나. 난 우리 주인이 날 보낼 때 그 눈빛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딱히 섭섭함은 없어. 다만, 저 햇볕에 반짝이는 초록잎들을 더 이상 눈에 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네…” 소년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와 오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우리 집은 마을 끝자락 으슥한 곳에 위치해서 인기척도 드문 곳이라 사람 소리가 들릴 턱이 없었다. 아직도 그때 충격에 사로잡혀 소를 피해 도망간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동물들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난 도살을 앞둔 가축들을 안심시키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물론 어른들은 나의 이 능력을 모르고 단지 동물들이 나를 잘 따르고, 언제부터인가 도살장 앞에서 난리를 치던 가축들이 평안하게 도살장 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양치는 일까지 나에게 떠맡긴 것이다.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은 장점도 있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데 차라리 대화가 안되면 무시해버리면 되는데 내가 들린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면 꽤나 피곤해진다. 이를 눈치챈 몇몇 양들은 이것저것 요구도 다양해지고, 때론 약삭빠른 양들은 자꾸 나에게 말을 걸어 본인이 더 편한 장소에서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장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럴 때는 다 똑같다.
여느 때와 같이 한가로운 낮에 살짝 졸고 있는데 저 멀리 양 한 마리가 검은 물체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닌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뿔나팔을 힘껏 불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바람에 날아온 검은 천을 잘못 뒤집어쓴 양이었다. 아뿔싸! 이미 마을 사람들은 호미와 괭이를 들고, 망치를 들고, 우리 아버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시퍼런 칼을 든 채 한걸음에 뛰어왔다. 다행히 해프닝인걸 깨달은 마을 어른들은 안심하면서도 한심하다는 듯 웃으며 마을로 내려갔다. 그때 처음 느꼈다. 나도 이 마을 공동체 일원이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소속감에서 오는 마음의 안정을, 집에선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그 느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바람이 서늘해진 어느 날, 문득 그때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위기관리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번엔 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위해 사자 발바닥 모양 신발을 신고 여기저기 걷고 나서 크게 뿔나팔을 불었다. “사자다. 사자가 나타났다. 빨리빨리 뛰어와요. 큰일 났어요.”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뛰쳐 올라왔다. 왠지 모른 가슴 벅참이 밀려왔다. "사... 사자가 어디 있냐?, 양은 몇 마리나 물어갔어?, 다친 데는 없고?" 마을 촌장님이 헐레벌떡 숨을 고르며 나에게 물었다. "뿔나팔을 불면서 제가 소리를 막 지르고, 어르신들이 올라오는 걸 눈치채니 저쪽 방향으로 도망갔어요." 혈기왕성한 마을 청년 3명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변을 수색하다가 숨겨놓은 사자 발바닥 신발을 발견했다. 얼굴이 벌개진 마을 촌장님이 나에게 자초지종을 캐묻자 고백했다. "갑작스럽게 사자가 나타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를 준비하는 차원으로..." 내가 말끝을 흐리자 어르신들은 아무 말도 없이 굳은 얼굴로 내려갔다. 저녁에 양을 몰고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허리띠를 풀고 계셨다. 사실 난 아버지의 폭행에 익숙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 없이 자라면서 아버지는 훈육이란 명목 하에 술만 드시면 쉴 새 없이 회초리를 들었었다. 지금 오른쪽 눈 밑에 난 상처도 아버지의 허리띠 버클이 눈 밑에 맞으면서 생긴 것이다. 아버지는 그 상처 이후로 체벌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이번엔 마을 어른들이 아버지에게 많이 가서 따졌나 보다. 이제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다. 한동안 죽은 듯이 지냈다.
양치기 일이 익숙해지니 삶이 너무나 무료하다. 매년 똑같은 풀이 자라나고, 언덕 위 바위는 하얀색 새똥이 쌓였다가 빗물에 씻겼다 반복할 뿐 매년 변함없이 그대로다. 얼마전부터 왠 떠돌이 개가 양치는 일을 돕게 되어서 내가 할 일이 더 없어졌다. 무료하기 그지없던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다가왔다. 옷은 비록 낡았지만 훤칠하고 잘생긴 용모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바닷가를 간다고 하는데 낡은 외투를 보니 오랜 기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나 보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에게 풀지 못한 정서적 욕구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그 나그네의 여유로움이 부러웠었나 보다. 괜한 불만으로 정반대 방향을 일러줬다. 나에게 감사하다며 인사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나그네 등 뒤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런데,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아 아테네 신이 노하셨나 보다. 바로 그다음 날,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났다. 진짜 사자가 나타났다. 난 힘껏 양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뿔나팔을 불려 했으나 너무 놀라서 손이 부들부들 떨려 뿔나팔은 모기 소리 마냥 작게 울려 퍼졌다.
저기 멀리 푸줏간 집 아들이 보인다. 마침 산속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는데 어디서 뿔나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혹시나 와봤더니 진짜 사자가 나타난 것 아닌가! 약초 수집을 하느라 변변한 무기를 챙겨 오지 못한 것도 있지만, 사실 칠십이 넘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푸줏간 집 아들이 고통 없이 떠나기를 아테네 신에게 기도하며 숨어서 지켜보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멀리서 봐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양치기 이 녀석이 사자에게 뭔가 지시를 하자 사자가 커다란 앞발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사자를 애완견처럼 다루다니 살아 평생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우리가 몰랐는데 저 녀석이 동물들을 다루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나 보다. 사자가 무서웠던지 껑충껑충 뛰어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사자는 저 멀리 사라지고 모든 상황 종료. 저 멀리 약초 캐는 심마니 할아버지가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오더니 울면서 말씀하신다. "얘야, 미안하다. 내가 구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겁이 나서 저 멀리서 바라만 봤구나. 그동안 네가 하도 거짓말을 해서 또 거짓말이면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생생하게 마을 사람들한테 일러줄 심산으로 온 거였는데 진짜 사자라니... 우리 마을의 소중한 자산인 양들을 지켜낸 너는 우리 마을의 영웅이다. 도대체 사자한테 어떻게 한 거니?" 양치기 소년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제가 오랫동안 아버지 푸줏간 일을 도우며 동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요. 사자가 앞발로 저를 내리치려는 순간 뿔나팔로 그 발을 찔렀어요. 사자의 약점이 오른쪽 발바닥이거든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돌팔매로 사자와 곰을 잡았다는 '다윗'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나를 보는 주변의 시선도 완전히 달라졌다. 마을 촌장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너는 양을 치는 일만 하기엔 너무 그릇이 크다. 혹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있니? 있다면 말해보렴.", "사실 전 어려서부터 가축을 죽이는 걸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죄책감이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가축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수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래, 양을 돌보는 것만큼 다른 가축들을 아프지 않게 지켜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우리 마을에 수의사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마을 사람들과 의논해보겠다."라며 긍정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그 후 나는 마을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수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난 후 마을에서 양치기 소년이 아닌 어엿한 수의사 청년으로 불려지게 됐다. 그것보다 가장 놀라운 건 마을 공동체에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나도 모르게 슬며시 터져 나오던 '거짓말'이 눈 녹듯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짓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일상생활에 자주 등장하는 가벼운 거짓말로는 애매한 시간에 고객사 미팅이 잡혔을 경우, 상대방이 물어본다.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네, 가볍게 먹고 왔습니다(이런 시간에 점심을 어디서 먹고 오냐? ㅠㅜ)" 또는 돌잔치 덕담으로 "아기가 참 예쁘네요", 신나게 직장에서 깨진 날 "이 놈의 회사 내일 당장 때려치워야지..." 등 등 알게 모르게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보통 거짓말을 할 경우 둘 중에 하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거나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이유다. 성인이 되고 나선 특별하게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선한 거짓말(white lies)'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들, 병원에서 많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래, 걱정하지 마"와 같이 눈물샘 솟게 만드는 거짓말처럼.
이솝 우화에선 단순히 양치기 소년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재미 삼아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다뤄졌지만, 사실 그 내면엔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 외부와의 단절감, 인정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좌절감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자기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로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연없는 거짓말은 없다.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거짓말이 잦아지면 신뢰를 잃고, 사람들을 잃게 된다."라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거짓말쟁이 소년'을 비난하는 손가락을 잠시 내리고, 우리 주변(가족, 직장, 커뮤니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그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고, 업무 퍼포먼스를 만들어낼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접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거짓말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솔직하게 전달하자
때로는 거짓말을 눈감아주는 아량도 필요하다. 하지만, 들통나지 않는 거짓말은 습관성 거짓말을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거짓말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손실'은 단순히 물질적 피해가 아니라 대상자에 대한 감정적 '손실' 역시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 메시지(I-Message)'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김대리가 거짓말을 하면 다른 직원들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어?", "박 과장, 이거 숫자가 안 맞는데 나한테는 맞다고 했잖아. 뻔히 걸릴 거짓말을 왜 하냐?"가 아니라, "김대리, 나는 솔직히 이번 일로 또 같은 일이 발생할 때 김대리에게 선입견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돼.", "박 과장님, 저는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가장 속상해요."와 같이 직접적으로 본인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거짓말을 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파악하자
직장 내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는 보통 업무와 연관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의도적인 정보 누락을 통해 본인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하거나, 과장된 포장으로 업무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또는 상대방)의 실수를 보호하기 위해, 상사의 강압적인 요구에 대항할 용기가 없을 경우에도 그렇다. '거짓말'이라는 상황에만 묶이지 말고 거짓말을 하게 된 배경과 대상자의 감정 상태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의지'를 갖고 신뢰하며, 칭찬에 인색하지 말자
인간은 연약한 감정의 동물이다. 한번 잃은 신뢰는 돌이키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스러운 망각에 기대는 것이 아닌 '의지'를 가지고, 강제적인 '신뢰'를 전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진정한 리더라면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떠한 일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진정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을 때 마을 촌장과 같은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과 건전한 관계를 이어가긴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 그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투자할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면 그에게 그 길을 열 수 있도록 우리는 도와주어야 한다. 또 다른 이유 한 가지. 내가 바로 그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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