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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May 05. 2016

순간을 곱씹는 일,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2004)을 보았다. 수년전 어딘가에서 본 이후로 제대로 본 것은 두 번째인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 20대 중반의 주인공들이 십 년이 지나 서른 중반이 되어 다시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 기대하게 하는 영화다. 생각해 보니, 비포 선셋을 먼저 보고 비포 선라이즈를 보았던 것 같다. 순서와 상관없이 영화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재미있게 본 것 보면 시간의 흐름대로 영화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의 기차 안에서 제시와 셀린의 떨리는 첫 만남과 낭만적인 비엔나의 풍경들, 20대 다운(?) 적극적인 대사들에 비해 비포 선셋의 그것들은 건조하고, 무미해 보인다. 허나 삼십 대가 되어 다시 본 비포 선셋의 주인공들의 대사의 밀도는 20대 때 본 비포 선라이즈의 대사보다 더 깊고, 공감도 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때문인지 10년 이란 시간의 힘은 커 보인다. 미소년 같던 에단 호크의 얼굴에도 흉터 같은 주름이 패이고, 아직은 덜 익은 싱그런 앵두 같던 줄리 델피의 얼굴에도 어딘가 모르게 속이 꽉 찬 농익은 열매가 보인다. 꿈을 이야기하고, 낭만을 나누던 순수했던(?) 그들이 거리낌 없이 섹스를 이야기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 말할 정도로 시간은 흘렀다. 이제는 돈이 없어 노숙할 일도, 그냥 길을 걸을 필요도 없다. 와인 한잔으로 잔디 밭에 누워 낭만적인 밤을 보낼 일은 더더욱 없다. 유명 소설 작가로, 순간적으로 거칠어질 정도로 현실과 일에 충실한 환경 운동가로, 그들은 달라졌다. 


흘러간 시간의 길이만큼 달라진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화에 끊어짐은 없다. 각자의 일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9년 전 그 날로 이어진다. 근 10년 만의 만난 사람들 같지 않게 표면을 겉도는 대화는 짧았다. 하룻밤의 만남과 기억이었지만, 그 하룻밤으로 10년을 지내왔다. 삶을 이끌어온 동력은 결코 결혼 생활도, 그들의 일도 아니었다. 짧은 순간의 시간과 그 기억이었다. 


남자는 그 순간의 기억을 안고 꿈을 꾼 채로 현실에 순응하여 살고, 여자는 순간의 기억을 잊으려 애쓰며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며 제각기 다르게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을 이끈 힘과 원동력은 그들이 보낸 하룻밤이었다.  


어떤 순간은 시간의 길이를 압도한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한 시간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강할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순간의 느낌과 장면을 꺼내보는 것이다. 그 순간의 동력으로 나를 정의하기도 하고, 미래의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순간이 아니다. 그 순간을 되짚고, 되뇌는 시간은 쌓이고 쌓여 영원이 된다.


 

비포 선라이즈가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찰나의 순간에 대한 영화라면, 비포 선셋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그 시간으로 인해 다시 만들어진 삶에 대한 영화다. 비포 선셋이 더 오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이미 지나온 순간의 시간을 곱씹어 보는 영화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은 열린 결말이다. 제시는 공항에 시간 맞춰 갔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고 셀린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9년 전 하룻밤 기억의 동력으로 긴 시간을 지내온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파리의 거리를 마음껏 눈으로 거닐 수 있는 것도, 줄리 델피의 매력적인 미소를 실컷 볼 수 있는 것도 비포 선셋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매력이다. 하지만 비포 선셋이 주는 가장 큰 남김은 교감의 대화에 대한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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