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아침, 거울을 보다가 새로 생긴 흰 수염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이를 키울 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 아이를 제외한 다른 집 아이들은 정말 빨리 자란다는 것이다. 꼬마 때부터 봐왔던 옆집아이는 볼 때마다, 키가 자라고, 수염이 났으며, 기타를 메고 다닌다. 어렸을 적 아들과 함께 어린이집에 다녔던 친구는 어느새 청년이 다 되어서, 절대 닮을 것 같지 않던 아이의 아이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다른 집 아이들의 나이는 신기할 정도 빨리 먹는다.
그리고,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넘어올 때마다, 친구와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년에 한 번씩 보는 얼굴들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어릴 적 찜질방에서 뛰어놀던 친구 아들은 이제 친구보다도 키가 커서 "가가가가?"라고 묻는다. 친구에게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다른 아들은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매형은 머리가 하얗게 쉬어서, 근존칭을 써야 하나 생각하게 하고, 어렸을 적 두꺼운 곱슬머리로 항상 고민하던 누나는, 얇고 볼륨 없는 머리로 안쓰러워 보인다. (하지만 얼굴을 여전히 보톡스로...) 친구들을 만날 때도 흰머리가 얼마나 났는지 묻게 되고, 염색을 안 하면 흰색이 가득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지만, 곧 내 머리도 더 이상 뽑는 걸로 해결이 안 된단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끄덕이기만 한다.
외국인들과 산다는 건, 나이 듦에 약간 무감각하게 해 준다. 인종마다 연령대에 맞는 얼굴이 다르고, 동양인의 40,50대가 백인의 30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어깨를 으쓱하기도 하고, 처음 본 나이 들어 보이는 분들이 사실은 나보다 동생이란 사살에 놀라기도 한다. 외모와 얼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고, 가늠할만한 이유도 느낄 수 없었다.
반면 한국에서의 사람과의 관계는 나이를 먹게 한다. 정확히는 관계는 나이를 느끼게 한다. 상대방의 말에서 내 나이를 느끼고, 나의 반응에서 나와 상대방의 나이차를 느낀다. 어린이 친구들이 쓰는 말과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말이 다르다. 나이에 따른 복장이 있고, 나이에 맞는 처신이 다르다. 10년 동안 나이 듦에 고민하지 않던 나는 갑자기 지난 10년의 나이 듦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나이 듦은, 나의 이민생활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게 해 준다. 처음 이민을 떠날 때도, 아이를 키울 때도, 그리고 이렇게 여행을 올 때도, 나는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살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자란 곳이고, 내 친구들이 있는 곳이기에 언젠가는 돌아올 그날이 많이 멀지 않았나 싶다.
영화 "터미널"에서 주인공 빅터가 터미널에서 계속 생활하자, 책임자 딕슨은 빅터에게 한 가지 대답만 하면, 오늘 밤 바로 공항에서 나가 뉴욕으로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완전히 합법적인 방법이고, 단지 한 가지 질문에 무섭다고만 대답하면 된다고 한다. 빅터는 뭐를 무서워해야 하는지 묻고, 딕슨은 사실살 그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고 하며, 딱 한 개의 질문에 답변만 하면 된다고 한다. 빅터는 기쁘게 웃으며 해보자고 하고, 딕슨은 질문을 한다. "당신은 당신의 나라에 돌아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리고 빅터는 금방 웃던 얼굴에 웃음을 거두고 대답한다.
"그건 내 집이에요. 나는 내 집이 두렵지 않아요. "
지난 7주간의 한국에서 생활했다. 앞으로 1주일 후면 나는 캐나다로 돌아간다. 시간은 흐를 것이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토론토로 출근을 하겠지만, 결국 언젠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란 걸 안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Home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