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두리 할머니 (1924~2006)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두리 할머니는..
아버지가 목수라, 어릴 때는-
어려운 형편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해버려,
갑작스레-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17세에,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고향 남자들의 말에 속아서, 삼량진으로 갔는데..
그게, 위안부가 되어-
대만으로 끌려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만의 위안소에서는-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굶기가 일수였고..
외출은 당연히 불가! 에,
무조건 '일본말' 을 써야 했으며..
군대식으로, 한 사람이 잘못을 하면-
전부가 몽둥이로 구타, 폭행을 당했는데..
이 때의 후유증으로, 평생동안 척추 질환과 중이염,
관절염 등.. 육체적인 고통을 겪으셨다. ㅠㅠ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글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할머니가,
도망을 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1945년, 해방과 함께- 다행히도,
수송선을 타고 귀국하게 된 할머니는..
고향인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모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생모와 계모가 낳은 자식들이 모두 합해 11명
이었는데.. 그 중, 첫째가 박두리 할머니였다.)
농부인 남편의 재취로 들어가게 되었고-
산골에 살면서, 아들 1명과 딸 3명을 낳았지만..
남편이 1975년에 죽고-
이어서, 아들과 딸 둘도 죽어 버려서..
가족은 오직, 딸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박두리 할머니는 1992년부터,
나눔의 집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하나 남은 딸에게는,
정부에 신고한 이유에 대해..
젊었을 때, 일본 공장에서 일을 했지만,
돈을 한 푼도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하셨다고 한다.)
여전히, ‘책임은 없다.’ 면서,
‘자의적으로 성매매를 하러 온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냐!
이대로는 절대 못 죽는다!!”
분노한 박두리 할머니는, 소송을 걸어..
영화 <허스토리>의 배경이 된 "관부 재판"에서,
정신대 피해자 배상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하셨다.
박두리 할머니의 애칭은 “청소반장” 이었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올 때면-
이 구석, 저 구석, 지적을 해가며.. 청소로,
군기를 잡았던 모습 때문에 붙여진 애칭이었고..
처음 만났을 때는, 괄괄하고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다가도.. 함께 지내다보면,
정이 많은 할머니 때문에, 금방 가까워지기도 했다.
귀가 잘 안 들려서, 보청기가 없으면-
대화를 전혀! 할 수가 없었던, 할머니는..
오랫동안 고치지 못했던 낡은 보청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나서, 너무 잘 들린다고-
무척이나 행복해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원래는 머리가 엄청 좋았는데,
위안소에서 하도 많이 맞아가꼬-
머리가 나빠진 기다.”
“내가 그때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고,
공부를 더 했으믄.. 국회의원이든 뭐든,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기다.”
이런 말들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익살스런 장난기로 툭툭- 던지시곤 했던 할머니는..
가끔, 술 기운에 취해서.. 노래를 흥얼거리시며,
한 많은 세월을 회고 하셨는데..
후유증 때문에, 평생을 앓아왔던 지병으로-
투병 생활을 계속 하시다가..
2006년 2월 19일 오후, 8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셨다. ㅠㅠ
병마로 인한 투병 생활 중에도,
"내일 데모 있제, 데모!" 하면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시위를,
무척이나 그리워하셨다고.. 기록 되어 있는-
'정대협' 의 병상일지가,
오래도록 아프게.. 가슴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