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옥련 할머니 (1919~2011)
전라북도 무주에서,
여섯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난, 박옥련 할머니는..
보통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16살에 결혼을 했는데..
어려운 살림살이에,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어머니가 넉넉하다는 집에 시집을 보냈으나..
막상 가서 보니, 신랑은 일자 무식꾼에-
아홉 식구나 되는, 무척 가난한 집이었고..
매일 나물을 캐서, 보리죽을 끓여야만 했다고 한다.
학대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그런 집에서 살 수가 없었던 할머니는,
몰래 도망을 쳐서, 5촌이 사는 거창으로 갔고..
5촌의 집에서 얼마간 지내기도 했지만,
계속 머물러 살 수는 없어서, 18살에-
이웃에 살던 김씨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은 좋은 가문에, 재산도 많았으나-
의처증이 심해서, 술만 먹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할머니를 많이 때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20살에 아들을 낳았지만-
끝내, 의처증을 버리지 못했던 남편은..
급기야, 아들을 빼앗고.. 23살의 할머니를,
아현동에 있는 직업 소개소로 팔아넘겼는데..
“너는 빚이 하도 많아서 조선에 있으면,
아무리 오래 일해도 그 빚을 다 못 갚는다.
야전 병원에서 군인들 옷을 빨아주고,
부상 군인을 치료해주는 위문단을 모집하는데..
거기서 한 3년만 일하면-
빚도 다 갚을 수 있고, 목돈도 만질 수 있다.”
소개소의 말을 믿었던 할머니는, 빨리 빚을 갚고-
다시 아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지원!!
(그때 소개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너무 좋은 데로 간다면서..
모두가 할머니를 부러워할 정도 였다고 한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산을 거쳐-
배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는데..
내리지도 못하고, 돌고 돌아- 한달 반이 지나서야,
남태평양의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에 도착했고,
강제로 끌려가, 3년간-
군대 위안소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 당했다.
해방이 되고, 고향에 돌아와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을 찾아가려 했으나..
돈도 없고, 부모님이 말리기도 해서-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었고..
그해 봄에, 면사무소의 호적계에 있던 사람의
소실로 들어갔는데.. 그는 할머니가,
라바울의 병원에서 일하다가 온 줄로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소실로 들어갔던 이유는,
아이를 못 낳을 걸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다행히(?!) 바로 아이가 생겨서,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남편이 면사무소를 그만두면서,
어려워진 살림살이에.. 아이들 공부를 시키려고,
식모살이에, 야채 장사에-
별의 별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하다가..
96년부터, 나눔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매주 열리는 수요 시위에 참석을 하게 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옥련 할머니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계신지 안계신지, 모를 정도로-
언제나 조용하셨던 할머니는..
온 사방이 시끄럽고 부산스러워도,
절대! 요동이 없으셨고.. 푸근한 미소에,
한결 같은 너그러움과 넉넉함으로..
말을 해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명히 아시는 할머니가 계셔서 참 좋았다.
"박옥련" 이라는 할머니의 존함 그대로-
마치 진흙탕 속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 한 느낌이었는데..
그럼에도, 당신이 나서야 할 때까지도-
너무 분명하게!! 잘 알고 계셔서..
2007년에는 미국 하원에..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의 조속 통과를 위한,
영상 편지를 발송 하기도 하셨다.
박옥련 할머니는.. 2011년 5월.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