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네 번째 시
우리가 쓰는 단어는 그것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일까. 나뭇조각 속에 흑연을 넣은 것을 왜 연필이라 해야 하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분주히 누르고 있는 이것을 왜 키보드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지금 글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표정 없는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인가. 때때로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던 그것을. 복잡하고 아련하게 했던 그것을. 과연 슬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걸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위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누군가를 해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면. 아들로서. 벗으로서. 동료로서. 나는 누구인가. 끝도 없이 너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 누가 그렇게 가르쳤고 왜 그렇게 배워야 했을까. 캔버스 전체를 채우지 않았다고. 사람들의 모습을 붉게 그렸다고 왜 낙제를 받아야 했을까. 사실 모든 인간들이 색맹이라서 색을 왜곡해서 보는 것이라면. 오히려 색맹들이 더 많은 색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고정관념들이 배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고결한 언어의 숨결들이 오랫동안 단어의 족쇄로 억압받고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이라면. 코를 부여잡는 불쾌한 악취들이 사실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피워낸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