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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Nov 12. 2019

10. 공백기를 지나서


    8화 이후, 글 쓸 마음을 먹기까지 오래 걸렸다. 나름 공백기를 가졌다,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까지, 20일가량 그렇게 쓰고 싶어 했던! 에세이 연재를 완전히 쉬었다. 9화는 에세이의 타임라인과 별개로 언젠가 올리고 싶어 세이브해놓은 글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소진하게 될 줄 몰랐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정말 솔직하게 얘기하겠다. 10월 중순에 경조증이 왔었다. (엄밀히 말하면, 경조증으로 보인다는 소견) 그 영향으로, 나는 미친 것처럼 글을 썼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문장이 범람했다.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괜찮았다. 창작욕으로 충만했고 의욕적이었다. 떠오르는 영감을 풀어놓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평생 가진 적 없던 자신감이 사지를 저리게 했다. 그 자신감으로 내가 무얼 했느냐?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글을 썼다!


    그렇다. 최소한 초반 몇 편의 글을 쓴 것은… 나의 병증이었다. 내가 아니라.


    그러나 나는 약을 조절해서 병증을 고쳤다. (정신과 약물의 전능함에 대해서는 이전 편을 참고하길) 모두가 나를 더러 ‘좋아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브런치 작가 심사를 한 큐에 통과했고, 하루에 1만 자씩 꼬박꼬박 글을 썼다. 그 고마운 경조증을… 나는 항정신병약을 증량하여 없앴다. 근래 나는 정신적으로 지체되어 있으며, 평소처럼 차분하고 우울하다. 즉, 글이 안 나온다. 8편까지 무슨 정신으로 글을 썼는지 감도 안 잡힌다. 그래도 바로 잡아야만 했다.


    경조증이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했지. 생산적인 분야에서만 발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절대 발휘되어선 안 되는 자신감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바로 죽을 수 있다는 자신감. 지금이라면 죽을 수 있겠다는 확신! 내가 평생 가지지 못했던 죽을 용기! 덕분에 난생처음 지혈이 어려울 정도의 자해를 했다. 반팔과 반바지로 가리지 못할 부위에는 흠집 내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도 깼다. 흉터가 남을 것 같다. 후회한다.


    그 정도 충동이 지속되면, 일을 칠 게 분명했다. 예약보다 이르게 정신과에 내원했다. 약을 조절하자 우스울 정도로 금방 진정이 되었다. 우연인지 경조증과 함께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쉽게 사라졌다. 마약이라도 한 듯한 행복감을 주었던 며칠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평소의 내가 되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리던 나. 빈 문서의 흰 화면을 보면 글쓰기가 막막해 손부터 떨리던 나.


    나는 무능한 ‘나’로 돌아갔는데, 매거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제야 느꼈다. 내가 이미 일을 쳤군.





    두 번째. 중도 휴학을 한 이후, 도무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에세이를 시간 순으로 쓰고 있었기에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캘린더, SNS, 메모, 휴대폰 사진첩을 샅샅이 뒤졌다. 보험 청구 이력까지 살폈다. 이 잡듯 뒤지니 뭐가 나오긴 나왔다. 친구도 만났고 운동도 다녔고 병원도 갔더라. 그런데 내 기억은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가 공백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랬다.


    그래서 당시 나를 만난 사람들에게 기억의 쪼가리를 찾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사회인이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정말, 최선을 다한다. 어떤 의미의 ‘최선’이냐 하면, 내 질퍽거리는 정신질환이 노출되지 않도록 머리에 엄청 힘을 준다. 상대가 이미 나의 질환 유무를 알더라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하곤 인연이 없는 사람처럼 굴기 위해 노력한다. 수포로 돌아갈 때가 많지만 어쨌든.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은 아니고.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걱정 끼치기 싫어서.


    그렇게 여기저기 물어본 결과…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나의 부단한 노력 덕분인지, 모두 나를 평범하게 기억했다. 도저히 글감으로 써먹을 만한 얘기가 없었다.


    큰일이었다! 이젠 진짜 뭐라도 기억을 해내야 했다.


    사람의 뇌는 영리하다.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또 쉽게 망각한다. 내가 전학 이전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잘 기억 못 하는 것이 예시다. 휴학 이후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한 달가량을 요령껏 망각해야 할 정도로 나는 고통스러웠던 듯하다. 눅눅한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나는 버텼다. 그 까마득한 공백기를.





    ‘나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여전히 그렇지만, 그때는 특히 심했다.


    체력이 달려서 재활 PT 진도를 쫓아갈 수 없었다. 가벼운 스트레칭만 하다가 돌아오는 날이 자주 생겼다. 차도 없이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자, 운동이 정말로 ‘낫는 방법’인지도 의심이 들었다. 그 와중에, 피트니스 센터가 대학가에 위치했다. 집에 가는 길이면 학교 방향에서 대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시험 기간이겠구나. 이제 중간고사 끝나고 과제 몰아치겠다. 학교 테두리 안 그들을 보며, 죽고 싶었다. 4월 말의 일이다.


    5월 초엔 여러모로 문제를 느끼던 B정신과에서  탈출했다. 약물 부작용에게서도 달아났다. 마냥 집에서 요양하니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통증도 견딜만한 수준까지 돌아왔다. 그러자 내가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자학이 기어 올라왔다. 정형외과 전문의 공인, ‘멀쩡한 몸’으로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자책이 들었다. 당연했다. 아무도 내게 병명을 주지 않았으니까. 피를 몇 통을 뽑고 어떤 기계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도 멀쩡하다는 소견만 돌아왔으니까.


    나는 생각했다. 뭐라도 하자. 푼돈이라도 벌어서 병원비에 보태자. 사회활동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우울증에도 도움이 될 거야. 알바 구인 어플을 깔았다. 단정한 증명사진을 업로드하고 간이 이력서를 작성했다. 학과장님의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돌이켜보면 완벽한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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