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목월의 시를 읽어본다.
얼떨결에 마주한 시였는데_ 목월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사무쳤다. 뿌리가 내린 그 나무들의 형상들이 수도승이고 과객이고 파수병인 것이_ 목월의 마음에는 무엇이 차 있었길래 그들이 그대로 자리를 잡은 걸까.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그의 상황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저 글을 보며 생각이 드는 것을 적는다.
여러 영혼을 가슴에 얹고 사는 목월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단순한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일까.
나무가 외로워서 나무가 추워 보여서
나무가 묵중 해서_
바람에 흔들리는 나를 비추는 거울에 나타는 나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풍경을 그린다.
외로움과 고독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의 모습을 한 아픔을 나도 품는다. 지나온 자취와 현재의 일상을 담은 보통의 인생 설계에서 머무르지 못하는. 또 다른 세월의 깊이에 깊이깊이깊이깊이_ 보이지 않는 고독을 찾아 심해 속 아주 어두운 곳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덜 괴롭히는 삶을 살고 싶다.
조금은 덜 눈치 보고, 덜 상처받고_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사회에선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으로 본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다. “타인은 지옥이다.”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이 결국 타인보다 못한 타인이 되는 것 같다.
나의 나무는 나를 덜 괴롭힌다.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 나무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수분을 머금고 있는 나무와 수문을 머금고 있는 나무와 수뭄을 먹고 있는 나무와 수눈을 머금고 있는 나무와 수군을 머금고 있는 나무가 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게 의미가 없고 모든 게 의미가 있고 모든 게 다 상관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