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칸도, 나의 일부
본론에 앞서 본인은 철저한 찍먹 ¹ 스타일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무언가를 깊게 파고들기 전에 일단 한 입. 새로운 앱을 써볼 때도, 노트나 펜을 고를 때도, 호기심이 생기면 일단 써본다. 정착보다 탐색, 완성보다 반응. 그래서 내 기록은 잔존과 불시착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다. 마치 기웃기웃 거리는 형태로 보일지라도, 직접 경험해 봐야 내 것이 될 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넌 꼭 데어봐야 뜨거운 지 알지
어릴 적 아빠가 했던 말 중 유독 거부감이 들었던 문장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결국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거였다. 이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빠 눈에 나는 쓸데없이 이것저것 다 건드려보고서야 울며불며 후회하는 아이였을 거다. 그리고 그 아이는 커서도 여전히 데어봐야 뜨거운 줄 안다. 아빠 눈엔 아직도 그 시절 철없던 그 아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지금의 내 정체성이 되었다.
굿노트에 빠졌던 시기가 있다. 하이퍼링크 ² 기능을 쓰면 마치 책장에 책을 가지런히 꽂아두듯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는 몇 달 쓰고, 한참 멈췄다가 다시 쓰길 반복한다.
다이어리도 그렇다. 매년 새 다이어리를 쓰지만, 매일매일 쓰지는 못한다. 그렇게 채워진 날보다 비워둔 날이 점점 늘어갔다. 월간 일정표는 채워지지 않은 날들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마치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놀려대는 것 같아서 한번 흐름을 놓치면, 덩달아 의욕도 놓치곤 한다. 반대로 주간 다이어리는 월간보다 술술 잘 써졌다. 하루하루 체크하듯 짧게 쓰기 좋았다. 그렇게 경험해 보고서야 내게 맞는 걸 찾아가게 된 거다.
둘러보고, 맞춰보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내게 딱 맞는 퍼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책이나 노트가 아닌, 사람이나 환경이더라도 말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일수록 더 그렇다. 어쩌면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안에 누구 없어요?” 노크하고, 대답을 들어야만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안심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온 거다. 기록 방식도, 사람과의 거리도, 하루를 다루는 속도도 나에게 맞는 호흡으로 천천히 맞춰가는 중이다.
여전히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중이지만 지금 사용하는 기록 노트의 종류는 이렇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오늘 하루만 잘해보자”며 말을 건네는 노트다. 데일리 타임라인 기능만 일정 확인용으로 쓰고 있지만, 그 기능 하나만으로도 다시 펼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문학동네 필사 노트는 본격적으로 문장을 옮겨 적고 싶을 때 손이 간다. 필사에 필요한 것들이 알차게 담겨 있어 괜히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아껴 쓰고 싶은 노트다.
이제 막 시작을 앞둔 노트도 있다. <아티스트 웨이>와 함께할 모닝 페이지 노트. 매일 아침을 맞이하듯, 하루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무지 A5 바인더는 외국어 공부, 아이디어 정리, 짧은 필사까지 용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쓰고 있다.
이 중 손이 많이 가는 건 단연 ‘파일로 팩스’이다. 내 입맛에 맞게 주간 속지와 노트로만 구성해 두었더니, 꽤 만족스러운 시스템이 갖춰졌다. 가격의 문턱이 높아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잘 쓰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든 점은 언제든 속지를 옮기거나, 넣고 뺄 수 있어서 원하는 순간에 멈추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크기마저 손에 착 감긴다. 어찌 맘에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시행착오가 잦은 사람일수록 매년 새 다이어리를 찾아 헤매기보다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는 바인더 형식을 써보길 권한다. 6공 펀치만 있다면 예쁜 엽서나 스티커도 내지로 쓸 수 있고, 꾸미는 재미가 더해지면 기록은 훨씬 더 오래 이어진다. 괜히 ‘다꾸’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니다.
쓰다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또 다른 방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내게 맞는 기록 방식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끝까지 채우지 못한 노트도, 반쯤 쓰다 만 다이어리도 지금의 나에겐 모두 유의미한 기록이다. 중요한 건 하나를 완벽히 채우는 일이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 다시 펜을 드는 것이다.
틈이 있어도 괜찮다. 머물렀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¹ 찍먹 : 일반적으로는 '물건의 끝에 가루나 액체 따위를 묻힌 것을 먹다'를 의미하는 '찍어먹다'의 줄임말. 또는 어떤 것을 어떻게 할지 정하기 전에 일단 한번 해보는 행위.
² 하이퍼링크 : 웹 문서 내에서 특정 위치나 다른 문서로 연결되는 참조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