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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17. 2021

나의 고기완자님아

수박

 한 달에 한두 번 고기가 무진장 당길 때가 있었다. 싱싱한 상추 위에 깻잎 한 장, 뜨끈한 밥 한 스푼, 지글지글 바싹 익어가는 삼겹살 한 점, 편마늘과 수제 쌈장을 넣어 입안에 쌈이 가득 차게 밀어 넣으면 없던 에너지도 생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욕구는 자주 일어나는 편이 아니라 어릴 적 엄마가 냉동실에 오래 묵은 고기들을 처리하는 일을 보곤 했다.


 저녁식사를 간단한 식사나 과일로 때우곤 했던 과거와 달리 남편을 만나면서 화려한 외식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소주 한 병을 곁들인 순댓국, 돼지 막창, 소곱창, 꽃등심 구이, 스테이크까지 나의 고기완자님은 내게 잘 익은 고기 한점 내어주며 행복해했다. 실로 즐거운 외식 덕에 그는 점차 뚠뚜니가 되어갔고 주머니는 홀쭉해져 갔다.


 결혼을 하고 외식비를 줄여보자는 취지로 우린 집에서 온갖 육식 요리를 섭렵해갔다. 어느새 그는 스테이크를 위해 온도계를 찾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수비드 기계를 알아보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진정 원하는 집밥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된장찌개에 나물반찬 몇 가지, 계란 프라이, 멸치볶음 같은 한국식 집밥을 준비하는 일은 후황에 찌든 기름때 제거를 제외하고는 한 큐에 끝나는 구이요리 보다 손이 많이 가서 자연스럽게 동네 정육점 사장님과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왔다. '먹는 게 곧 나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지만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 예방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식생활을 바꿔보기로 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팔체질검사를 받고 내게 더 유익한 음식들을 먹기로 했다.


 오랜 대기와 두 번의 진료 끝에 나는 수음 체질, 남편은 목양 체질이라는 한의사분의 말씀을 전해 들었다. 오진 확률도 조금 있다지만 서로 살아온 패턴을 돌아보면 대략 맞는 듯하였다. 남편은 땀을 많이 빼는 사우나를 즐기고 소고기, 밀가루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라는 점, 나는 열탕에 들어갔다 나오면 현기증이 나고 뿌리채소를 좋아하는 등 체질과 맞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은 수음 체질에겐 수박이나 참외처럼 찬 과일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매해 여름이 되면 배앓이를 하다 변기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때가 많았는데 과하게 틀어대는 에어컨 사이에서 생긴 냉방병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체질검사를 하고 나니 여름내 거르지 않고 먹었었던 무지막지한 양의 수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열이 많은 것을 내장기관까지 동일하다고 속단해 찬 음식을 많이 먹었던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후회는 늦었고 그제라도 체질별 섭생표를 따라보기로 했다.

 

 식단을 조절을 하는 김에 오랫동안 숙원 사업 같았던 붉은 육류는 먹지 않기로 했다. 두부로 마요네즈를 만들고 고기의 식감을 대신하는 온갖 버섯과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여러가지 곡물들과 친해졌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먹는 냄새가 덜 나는 청국장 같은 템페까지 다양한 채식요리를 시도해보았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다. 남편의 고기 굽는 실력에 반해 집에 놀러 오는 손님들도 많거니와 내 아무리 풀떼기를 좋아하는 편이라지만 남편이 먹는 맛깔스러운 소고기, 돼지고기를 메인으로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홀로 채식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붉은 육류와 더불어 한 철 수박을 끊었더니 겨울에 나온 수박을 보고 눈이 돌아갔다. 금단현상이 온 것이다. 다음 해 여름 친정 냉장고에 있는 수박을 몇 끼 굶은 거지처럼 배가 터지도록 먹어 제꼈다. 입에 당기는 음식을 먹는 게 좋은 거라던 엄마의 말 마따라 그저 먹고픈 음식들 편히 먹고살겠다며 나의 다짐은 금세 느슨해졌다.

 

 

나의 의지박약을 감추기 위해 남편 탓을 하던 중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멋들어져 보이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육식을 피하고 식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이란다. 결혼 전 나는 거의 플렉시테리언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육식을 피하는 것과 육식을 원래 즐기지 않는 편은 다르다. 그러니 내가 플렉시테리언이라고 하는 것은 구차하고 비겁하다 생각되었다.


 여전히 나는 육식을 고의적으로 피하고 싶지만 이를 자꾸 유예하게 된다. SNS에 사진 한 컷으로 보이는 대단한 채식가들이 많아 오히려 사기가 떨어질 때도 있었다. 사진만 봐서 마치 내게 그들은 노력 없이 이루어진 천재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실 자연스러운 채식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 짐작하지만 나의 결심을 미루기 위해 자꾸만 그들의 노력을 보는 일을 멀리했던 것이다.


 그래도 가끔 찾는 환경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작가 유발하라리의 책을 다시 들춰보면 결국 나도 더불어 채식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들의 눈이 얼마나 순하고 아름다웠는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쓸데없이 좋은 기억력이 내 발목을 잡는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때마다 땀을 흘리는 남편은 나의 뜨겁고 칼칼한 찌개엔 멀쩡했다가도 한 겨울 우래옥에서 평양냉면을 흡입하며 땀을 흘린다. 그런 그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기력이 보충되는 것 같다고 소고기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씁쓸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나도 실천하기 어려운 채식을 그에게 함께하자고 한다면 잔인하게 죽어가는 소들에 비할 수 없지만 그에게도 잔인한 일이 될 것 같다. 비록 나는 채식에 실패했지만 언젠가 다시 시도해보며 그와 유연하게 공존하는 것이 아쉽게도 나의 생존에서 우선순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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