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멜론이 1900원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보았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한주에 8만 원 언저리로 매도했던 삼성전자 주식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주식어플을 켜보니 6만 원대가 된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상한 비유일 수는 있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의 문외한일지라도 모두가 주식 얘기를 할 때였다. 8900원이었던 멜론이 다음 날 7900원, 다음 날, 6900원, 5900원...
가격이 4900원이던 날에도 횡재했다는 생각에 멜론 두통을 보여주며 남편에게 몇 번을 자랑했다.
남편은 "그럼 많이 사서 배송받지 그랬어."
"집에 멜론이 많이 있으면 왠지 맛있게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리고 얼마 후 집에 있는 멜론을 다 먹기도 전에 가격이 1900원으로 떨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꼭지가 말라비틀어져있는 멜론을 사려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고 마트에서는 상하기 전에 헐값으로 팔아치워야 했을 것이다. 잘 살펴보고 곰팡이가 슨 부분이 없다면 메마른 꼭지는 후숙이 잘 된 멜론이라 집에 가서 바로 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과일을 매도할 수 있는 화곡동에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화곡동은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설명한 살기 좋은 동네의 조건의 많은 부분을 갖추고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장, 괜찮은 카페들, 산책하기 좋은 산, 공원, 시장이 있다. 그 외 중요한 학군 문제나 신축 빌라가 많아서 재개발이 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그 때문에 시세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내 집이 없는 마당에 내심 감사하기까지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큰 도서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도 살고 싶은 곳이 있다. 이십 대 중반 파주에 도서관 지혜의 숲이 생긴 이래로 가장 살 고 싶은 지역은 변함없이 파주였는데 몇 년 전 인왕산 둘레길을 돌다가 수성동 계곡과 청운 도서관 사이 낮은 집들을 보며 이 동네도 참 살기 좋겠다 하고 부러워했다.
요즘은 어디에 살 던 거실 창밖으로 사계절이 보이는 집에 살고 싶다. 컨디션에 따라 트레킹 코스를 선택할 수 있을 만한 적당히 높은 산과 넓은 바다를 차로 30분 이내로 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구나 싶지만 이것도 아직 아이가 없으니 할 수 있는 맘 편한 상상이다. 혹시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를 위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 욕망이 생길 테다. 이렇게 잡념이 길어질 때면 화엄경의 사법계를 떠올린다. 법륜 스님의 책마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사법계를 설명해 주시는데 참 흥미롭다. 사법계는 쉽게 말하면 마음공부 수행을 네 단계로 나누는데 화곡동에 살며 살고 싶은 동네를 떠올리는 내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화곡동에 살아서 괴롭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사람. (물드는 사람)
두 번째, 화곡동보다 더 나은 곳으로 떠나는 사람.(물 들지 않는 곳으로 떠난 사람)
세 번째, 어디에 살던 상관이 없이 자유로운 사람. (물 들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
네 번째, 어디에 살 던 상관없고 내 한 몸 걸레가 되어 기왕 사는 이 동네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사람. (물들이는 사람)
종종 나의 여러 상황 들을 사법계의 어디쯤에 있나 점검해보곤 한다. 살고 싶은 동네에 대해서는 네 번째는 언감생심 세 번째이고 싶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것 같다. 물든다 하여 나쁘고 물들인다 해서 좋다 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물드는 사람인데 물들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지난한 시간들이 스스로를 오래 괴롭혔던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