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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12. 2021

여성의 절반은 치질이라지

용과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치질에 다 걸리고 어쩐데. 어휴 창피해서 아프다고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겠어."

이십 대 싱그러운 한 때 나는 치질을 앓았다.


문래동의 쇠 갈리는 소리 가득한 철강소들 사이 후미진 공간. 남편 그러니까 당시 남자 친구의 자전거 관련 사업장이 있었고 그 구석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대학 동기와 함께 작업공간으로 쓰기 위해 추운 겨울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장판을 깔았다. 다음 날 똥꼬가 움찔움찔하더니 날이 지날수록 그곳이 격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앉는 것은 물론이고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기도 불편한 상태가 되어 항문외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명, 간호사의 표정, 나이 든 의사의 안경테마저 차가운 병원에서 카메라가 달린 더 차가운 금속막대기가 고통의 부위 속을 탐험했고 모두들 매서운 눈으로 작은 모니터를 응시했다. 긴장된 순간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은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며 더 긴장된 말씀을 하셨다. 부분마취는 바로 퇴원, 전신마취는 며칠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기에 회사를 다니고 있는 입장이라 나는 고민의 여지없이 부문마취 수술을 감행하기로 했다.


인생의 첫 수술이었다. 항문에 부분마취를 하는 것은 마치 입술 주변에 빨대만 한 주사를 세 방 놓는 것과 같았다. 그것도 고통이지만 섬세하고 많은 신경을 단시간에 마취시키는 일은 수월하지 않은 듯했다. 레이저가 닿으며 수술부위가 타들어가는 그 순간 나는 잠시 저 세상을 다녀온 듯 넋이 나갔다. 만년의 시간이 흐르고 온 몸이 굳어버린 상태로 회복실에 들어갔다.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갑자기 치질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괜찮냐는 말과 웃음을 참는 듯한 흐느낌이 들렸다. 나는 더 흐느꼈다.


병원을 나와 업무 복귀를 하러 간 회사에서 만난 직장 동료는 동그란 구멍이 난 침대에 얼굴을 넣고 고통을 참다가 생긴 턱의 멍을 보며 함께 슬픔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본인 남편의 과거 치질 수술 후기를 공유하며 용과를 꼭 먹어보라고 권했다. 원활한 배변활동을 위해 여러군데서 미역국을 추천받긴 했지만 빠른 회복을 갈망하며 용과의 엄청난 효과도 믿어보기로 했다.




화려한 색상에 비해 맹숭맹숭한 하얀 순둥이 맛. 아이스크림 바 속에 숨겨진 톡톡 터지는 초콜릿 같은 씨앗.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저버리는 맛이 겉멋 잔뜩 부리는 내 모습 같았다. 화려하지도 않고 순둥이 같은 성격도 아니지만 가끔씩 오만방자하게 굴다가도 스스로 별 볼일 없다고 느껴질 때 용과가 떠오른다. 알고 있는 가장 어려운 영어단어가 hypochondria (건강염려증)이라고 생각될 만큼 건강관리에 유난스럽게 굴면서도 내 몸 하나 간수 못하고 아가씨가 치질에 걸려 어쩌냐는 아빠의 말을 듣고 속으로 궁시렁 대고 있는 치질에 걸린 찌질한 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아가씨가 치질에 걸리면 뭐 어때서'


동남아 과일을 동네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끔씩 용과를 보게 된다. 웃프게도 용과를 보면 치질이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란 인간은 꺼내기 어려운 치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만한 용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또 오만방자하게 억지스럽고 건방진 바람을 갖는다. 이 바람이 언젠가 겉멋이 아닌 멋이 되는 날이 올 수 도 있지 않나 하고 나는 종종 모양새 빠지는 겉멋 촤르르한 생각을 즐긴다.


요즘 가난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젊은이들 처럼 이따금 나의 인생 도처에 있는 치부를 드러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나면 어쩐지 나의 작고 큰 상처들이 조용히 아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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