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타샤 Oct 12. 2021

물드는 사람, 물들이는 사람

멜론


멜론이 1900원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보았다. 고개가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한주에 8만 원 언저리로 매도했던 삼성전자 주식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주식어플을 켜보니 6만 원대가 된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상한 비유일 수는 있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주식의 문외한일지라도 모두가 주식 얘기를 할 때였다. 8900원이었던 멜론이 다음 날 7900원, 다음 날, 6900원, 5900원...

가격이 4900원이던 날에도 횡재했다는 생각에 멜론 두통을 보여주며 남편에게 몇 번을 자랑했다.

남편은 "그럼 많이 사서 배송받지 그랬어."

"집에 멜론이 많이 있으면 왠지 맛있게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리고 얼마 후 집에 있는 멜론을 다 먹기도 전에 가격이 1900원으로 떨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꼭지가 말라비틀어져있는 멜론을 사려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고 마트에서는 상하기 전에 헐값으로 팔아치워야 했을 것이다. 잘 살펴보고 곰팡이가 슨 부분이 없다면 메마른 꼭지는 후숙이 잘 된 멜론이라 집에 가서 바로 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과일을 매도할 수 있는 화곡동에 대체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화곡동은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설명한 살기 좋은 동네의 조건의 많은 부분을 갖추고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장, 괜찮은 카페들, 산책하기 좋은 산, 공원, 시장이 있다. 그 외 중요한 학군 문제나 신축 빌라가 많아서 재개발이 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그 때문에 시세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내 집이 없는 마당에 내심 감사하기까지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큰 도서관이 없다는 것이다.

 

내게도 살고 싶은 곳이 있다. 이십  중반 파주에 도서관 지혜의 숲이 생긴 이래로 가장   싶은 지역은 변함없이 파주였는데    인왕산 둘레길을 돌다가 수성동 계곡과 청운 도서관 사이 낮은 집들을 보며  동네도  살기 좋겠다 하고 부러워했다.


요즘은 어디에   거실 창밖으로 사계절이 보이는 집에 살고 싶다. 컨디션에 따라 트레킹 코스를 선택할  있을 만한 적당히 높은 산과 넓은 바다를 차로 30 이내로   있다면 금상첨화겠구나 싶지만 이것도 아직 아이가 없으니   있는  편한 상상이다. 혹시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를 위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 욕망이 생길 테다. 이렇게 잡념이 길어질 때면 화엄경의 사법계를 떠올린다. 법륜 스님의 책마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사법계를 설명해 주시는데  흥미롭다. 사법계는 쉽게 말하면 마음공부 수행을  단계로 나누는데 화곡동에 살며 살고 싶은 동네를 떠올리는 내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화곡동에 살아서 괴롭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사람. (물드는 사람)

두 번째, 화곡동보다 더 나은 곳으로 떠나는 사람.(물 들지 않는 곳으로 떠난 사람)

세 번째, 어디에 살던 상관이 없이 자유로운 사람. (물 들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

네 번째, 어디에 살 던 상관없고 내 한 몸 걸레가 되어 기왕 사는 이 동네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사람. (물들이는 사람)


종종 나의 여러 상황 들을 사법계의 어디쯤에 있나 점검해보곤 한다. 살고 싶은 동네에 대해서는 네 번째는 언감생심 세 번째이고 싶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것 같다. 물든다 하여 나쁘고 물들인다 해서 좋다 할 수도 없다. 다만 나는 물드는 사람인데 물들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지난한 시간들이 스스로를 오래 괴롭혔던 것은 사실이다.





이전 03화 귀여움은 우주 최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