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1편에 이어서)
숙소 근처에는 각종 수공예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마라케시 혼돈의 메카 제마알프나 광장이 있었다. 며칠 지내보니 그 일대가 제법 익숙해졌다. 하지만 메디나 바깥의 신시가지까지 둘러본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대낮이라 해도 헤매긴 마찬가지였다. 그 집이 그 집 같은 어떠한 표식도 없는 문을 겨우 찾아 들어가면 전통가옥인 리아드의 네모난 건축물 사이 뻥뚤린 천장이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리아드 내부에 있는 열대식물들과 난간들 위에 쏟아져 며칠간 불안했던 부끄러운 마음이 잠시 머물렀다. 해가 지고 도시 전체에 울리는 몽롱한 기도문(아잔)을 들으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 하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마라케시의 건물 밖과 건물 안의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메디나의 거리를 방황하다 발길을 따라 우연히 비밀의 정원(Le jardin secret)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엔 밖에서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작은 천국이 있었다. 담장 밖의 질리도록 맡은 매캐한 매연과 지린내를 요새의 높은 건물 외벽이 막아주었고 정원의 허브향에 한번, 건축물을 도배한 화려한 타일 무늬와 우아한 색감에 두 번 취한 것이다.
여행 전 사진으로 여러 번 눈도장 찍었던 입생 로랑의 마조렐 정원 역시 특유의 싱싱한 색감에 눈을 떼기 어려웠지만 아름다움의 정점에는 모로코 랜드마크 호텔 라마무니아(La mamounia)가 있었다. 신혼여행기념 플렉스를 한답시고 우린 감추기 어려운 큼지막한 배낭을 멘 채로 럭셔리한 로비에 버젓이 들어갔다. 전신을 휘감는 매혹적인 향과 으리으리한 규모를 감싸는 실내장식에 압도되어 슬며시 배낭을 내려놓고 널찍한 소파에 앉아 체크인을 기다렸다. 동양에서 날아온 신혼부부에게 지배인은 매우 상냥한 표정으로 본인도 찾기 어려울 것 같은 수많은 계단을 지나 복도 끝방의 카드키를 내주었다.
진부한 인종차별 서비스를 받고 언짢아진 것도 잠시 객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 서로의 미감 배틀이 시작되었다. 침대 베드에 박힌 징, 테이블 위에 비치된 가죽 다이어리의 박음질, 욕조의 수전마저 완벽하다며 번갈아가며 평가하다 이내 지쳤다.
"그래서 여기가 1박에 얼마라고?"
"그냥 비싸.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이라고 찬양한 셀럽이 수도 없데. 근데 갸들은 스위트에 묵었겠지." 가격 대비 작은 듯한 객실이 불만스러워지자 후딱 수영복으로 환복 했다. 여행 처음으로 허니문답게 두 마리 물개들은 호텔 내부의 스파와 야외 수영장을 퐁당거리며 이리저리 누볐다. 예상 밖의 지출을 상쇄시키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가난한 여행을 해야 할지는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달콤했던 허니문도 잠시 메디나의 좁은 길을 다니는 것이 여유로워지자 사하라 사막 투어를 떠났다. 작은 벤에 몸을 욱여넣고 멀고 먼 여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오래전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방비엥 사이를 잇는 길 위에서 난생처음 심하게 멀미를 한 적이 있다. 가드레일 없는 높고 좁은 길을 남들은 쉬이 가는 듯 보였지만 나는 영 불안해서 마음 졸였던 것이다. 그때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하라 사막을 향하는 아틀란티스 산맥 위는 라오스 때와 달리 운전기사마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말하지 않아도 핸들을 살짝만 삐끗했다가는 모조리 다 뒈질 것 같은데 기사는 위험한 구간이고 이런 곳을 세 시간 정도 더 가야 한다며 주절거린다. 그는 끝날 것 같지 않은 낭떠러지 위의 길에서 여러 번 차를 멈추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오래 달렸다.
아슬한 길도 지겹고 다시 아슬해진 부부 사이도 지겹고 무엇보다 이런 여행을 떠나고자 마음먹었던 내가 지긋지긋했다. 불안감에 폭발할 것 같은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창 밖 쳐다보지 말고 한숨 자. 그리고 여기 오자고 해서 진짜 미안해." 남편은 숨을 크게 내쉬고 대답이 없었다.
사막으로 가는 길 잠시 머물렀던 마을에 올리브나무 사이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이드는 잘 익은 석류를 따고 몇 조각으로 더 쪼개어 여행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석류의 보석 같은 씨들은 보지도 않고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시큼해도 좋으니 상처투성이의 작고 못생긴 석류가 있는 한국으로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틀 만에 도착한 사막이 멀리 모이기 시작하자 운전기사는 느닷없이 신나는 제3세계 음악을 틀었다. 피곤에 절어있는 다국적 여행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신나게 상체를 흔들어댔다. 그제야 남편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기다란 속눈썹을 끔뻑거리는 낙타의 등 위에서 미안하게도 합을 맞추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모로코 마지막 여정에 올라탔다. 저녁식사로 나누어준 꾸스꾸스를 몇 입 뜨다 말고 남편과 나란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귀한 뜨거운 물을 얻어 배낭 속 업소용 라면수프를 컵에 적당히 털어 넣었다. 동행했던 유럽 여행객들도 호기심에 맛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계 한국인과 우리 부부 세명만이 '그대들이 이 맛을 알 턱이 있나'하고 게슴츠레한 눈빛을 교환했다.
모로코 여행의 클라이막스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촘촘한 별과 유성, 술은 절대 마시지 않지만 마리화나를 권하는 사막의 베르베르족이 있었다. 보드라운 모래에 맨발을 넣고 꼼지락거리며 우린 아껴왔던 독한 술을 모조리 마시고 뱅글뱅글 도는 거대한 검정 원반 위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까마득해졌다. 대체 여기까지 왜 왔지, 목적지에 왔는데, 계속 목적지 위에 있었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내 모든 게 흐리멍덩해졌다.
전우애가 한껏 다져진 남편과 함께 만들었던 사막의 발자국은 오래전 바람에 흩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나의 작은 세상을 대체로 만족하고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나의 어리석음은 반짝이는 것들에 쉽게 매혹될 것이다. 그리곤 예상 밖의 시큼한 맛을 참고 즐겨보려다 결국 퉤 하고 뱉어버릴 수도 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그간 써왔던 일기를 바탕으로 모로코 여정을 정리하다 남편에게 읽어 준 적이 있다. 제목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는 내게 남편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겐 모로코 여행을 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