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꽃피는 춘삼월 예대 한켠에 폐공장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무대 제작소에서 겉멋의 끝판왕을 만났다. 우연히 남이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이전에도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이 몇 있었는데 그를 본 나의 첫인상은 제작소에서 시작되었다. 말끔한 얼굴에 펑퍼짐한 카라티, 헐랭 한 청바지, 감추고픈 짧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 놓은 채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살짝 웃음을 흘렸다. '고놈 웃는 모습은 참 예쁜데... 겉멋이 덕지덕지... 으으윽 정말 싫어' 하고 생각했다. 당시 고매한 나의 겉멋이란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기억의 습작 같은 노래 제목 따위에 감탄하고 산울림과 같은 네이밍 센스에 무릎을 탁 치며 함께 통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치렁치렁 떨고 있는 체인을 허리춤에 달아 놓길 좋아하는 겉멋 끝판왕 선배님과 연애하고 결혼도 해버렸다. 점잖은 척 허세 가득했던 나의 업보인 것이다.
함께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하고픈 일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방황을 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겉멋 끝판왕답게 제안받았던 패션 에디터 자리와 자전거 커스텀샵 운영 두 갈래 사이 무엇을 할지 고민했고 나는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솔직하게는 나의 트라우마와 곧잘 연관되는 남자들의 사업 로망을 빨리 깨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일산 화전동에 있던 그의 첫 작업장은 문래동으로 이사했고 우린 오랜 연애기간의 절반 정도를 문래동에서 보냈다. 그는 여적 젊은 놈이지만 그곳에 자신의 청춘을 갈아 넣었다고 지금까지 애잔하게 거들먹거린다.
우리가 함께 한지 십 년 차 되던 날도 문래동에서 맞이했다. 허세 가득 친구들 생일은 잘 챙겨주려 했지만 서로의 주머니 사정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십 주년에 무얼 갖고 싶냐고 하기에 화분이 갖고 싶다고 했다. 정말 화분이 갖고 싶었다. 사찰 냄새나는 향을 주구장창 피워대도 쿰쿰한 냄새가 잘 사라지지 않는 실내에는 자연광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 같은 목재 건물의 천장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고양이들이 쥐들과 술래잡기하느라 쿵쾅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번쩍 뜨이는 곳이었다. 분명 지상에 있는 곳이었지만 나는 매일 그 안에서 자연광을 찾아 헤맸고 그곳에서 나는 뼈저리게 초록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았다. 십 년이 되던 날 그는 내게 블루베리 화분을 선물해 주었다.
싱그러운 연둣빛 결실을 맺은 블루베리 나무를 선물했기에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열매가 익기에 그다지 키우기 어렵지 않았고 소소한 기쁨을 듬뿍 주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받으라고 바깥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두었더니 뜨거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블루베리는 자라났다. 그러나 싱그러운 열매를 아무도 먹지는 않았다. 에어컨 실외기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나도 먹기 싫은 그 열매를 마다하는 지인들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차마 먹지는 못하고 블루베리를 버리기 전에 혀끝으로 살짝 맛을 보고는 예상치 못한 시큼한 맛에 불쾌해져 과실을 더 나누어 보고 껍질을 벗겨보고 엄지와 검지로 으깨 보았다. 손가락에는 진한 검정 물이 들었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블루베리는 살려달라고 입을 별 보양으로 뻐끔거리고 있었다.
덜익은 블루베리같은 애들 여럿이 오밀조밀 모여 서로 더 퍼렇게 익고 싶어서, 때론 연두빛 제자리에 머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서로 알게 모르게 물들이기도 했다. 다시 블루베리 키우고 먹어본다 한들 다른 맛일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내 손으로 으깨버리지 않고 적당히 바라보다 땅에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덜 아쉬워하며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