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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12. 2021

문래동 연가

블루베리

   

 꽃피는 춘삼월 예대 켠에 폐공장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무대 제작소에서 겉멋의 끝판왕을 만났다. 우연히 남이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이전에도 우리가 함께 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를  나의 첫인상은 제작소에서 시작되었다. 말끔한 얼굴에 펑퍼짐한 카라티, 헐랭  청바지, 감추고픈 짧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 놓은 채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살짝 웃음을 흘렸다. '고놈 웃는 모습은  예쁜데... 겉멋이 덕지덕지... 으으윽 정말 싫어' 하고 생각했다. 당시 고매한 나의 겉멋이란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기억의 습작 같은 노래 제목 따위에 감탄하고 산울림과 같은 네이밍 센스에 무릎을  치며 함께 통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치렁치렁 떨고 있는 체인을 허리춤에 달아 놓길 좋아하는 겉멋 끝판왕 선배님과 연애하고 결혼도 해버렸다. 점잖은  허세 가득했던 나의 업보인 것이다. 


함께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하고픈 일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방황을 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겉멋 끝판왕답게 제안받았던 패션 에디터 자리와 자전거 커스텀샵 운영 두 갈래 사이 무엇을 할지 고민했고 나는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솔직하게는 나의 트라우마와 곧잘 연관되는 남자들의 사업 로망을 빨리 깨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일산 화전동에 있던 그의 첫 작업장은 문래동으로 이사했고 우린 오랜 연애기간의 절반 정도를 문래동에서 보냈다. 그는 여적 젊은 놈이지만 그곳에 자신의 청춘을 갈아 넣었다고 지금까지 애잔하게 거들먹거린다.



우리가 함께 한지 십 년 차 되던 날도 문래동에서 맞이했다. 허세 가득 친구들 생일은 잘 챙겨주려 했지만 서로의 주머니 사정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십 주년에 무얼 갖고 싶냐고 하기에 화분이 갖고 싶다고 했다. 정말 화분이 갖고 싶었다. 사찰 냄새나는 향을 주구장창 피워대도 쿰쿰한 냄새가 잘 사라지지 않는 실내에는 자연광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 같은 목재 건물의 천장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고양이들이 쥐들과 술래잡기하느라 쿵쾅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번쩍 뜨이는 곳이었다. 분명 지상에 있는 곳이었지만 나는 매일 그 안에서 자연광을 찾아 헤맸고 그곳에서 나는 뼈저리게 초록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았다. 십 년이 되던 날 그는 내게 블루베리 화분을 선물해 주었다.   

싱그러운 연둣빛 결실을 맺은 블루베리 나무를 선물했기에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열매가 익기에 그다지 키우기 어렵지 않았고 소소한 기쁨을 듬뿍 주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받으라고 바깥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두었더니 뜨거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블루베리는 자라났다. 그러나 싱그러운  열매를 아무도 먹지는 않았다. 에어컨 실외기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나도 먹기 싫은 그 열매를 마다하는 지인들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차마 먹지는 못하고  블루베리를 버리기 전에 혀끝으로 살짝 맛을 보고는 예상치 못한 시큼한 맛에 불쾌해져 과실을 더 나누어 보고 껍질을 벗겨보고 엄지와 검지로 으깨 보았다. 손가락에는 진한 검정 물이 들었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블루베리는 살려달라고 입을 별 보양으로 뻐끔거리고 있었다.


덜익은 블루베리같은 애들 여럿이 오밀조밀 모여 서로 더 퍼렇게 익고 싶어서, 때론 연두빛 제자리에 머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리고 서로 알게 모르게 물들이기도 했다. 다시 블루베리 키우고 먹어본다 한들 다른 맛일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내 손으로 으깨버리지 않고 적당히 바라보다 땅에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덜 아쉬워하며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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