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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12. 2021

부끄러운 게 부끄러워서

자두




“언니, 아까 사과밭 가는 길에 어떤 여자애가 맨손으로 매미를 잡는 거 있지. 촌년.”

순간 사촌언니의 검정 눈동자가 한없이 작아졌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은 난생처음이었다.

“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알았어?”

자동으로 고개를 몇 번을 끄덕거렸다.

서울에서 온 여자아이란 사실에 지배당한 뇌와 저속한 단어를 쓰고 싶은 욕망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태연자약하게 촌년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것이다. 그렇게 나의 부끄러운 생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까탈스럽게 옷을 골라 입기 시작할 무렵 명절이 다가오면 김천의 작은 마을에서 무엇을 입을지 오래 고민했다. 무뚝뚝한 엄마, 아빠와는 달리 명절마다 내려가는 아부지 고향에서 만나는 친척 어른은 칭찬쟁이들이었다. 짐작컨대 가장 귀여웠을 시절 칭찬의 디폴트 값이 껑충 뛰어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깜찍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무렵 작은 욕망의 항아리 같았던 어린 내게 더 사랑받는 방법이란 꼬까옷을 입는 것이었다.


  


 그날도 예쁘게 차려입고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시골집 현관에 쌓여있는 큰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자두밭에 따라갔다. 온 가족이 시커멓게 잘 익은 자두를 땄다. 땅거미가 자꾸 발등 위를 올라탔고 나는 괴물처럼 양 발을 쿵쾅대느라 좋아하는 과일 따기는 뒷전이었다. 항상 주어진 일에 열심인 엄마가 느닷없이 내게 손짓했고 가까이 다가가자 진보라색 자두를 건넸다. 우리 모녀는 주렁주렁 열매가 풍성한 자두나무 사이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곳엔 자두로 잔뜩 배를 채운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우린 조용히 자두를 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말캉말캉한지 자두 껍질을 앞니로 아주 작은 구멍을 내고 과육을 쏘오옥 빨았더니 씨를 품고 있는 촉촉한 덩어리가 입천장을 훑고 볼을 볼록하게 만들었다.


 오래전 자두밭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가 좋아진다. 자두가 나올 철이면 양쪽 무릎이 볼록 튀어나온 운동복을 입고 과일 매대 앞을 서성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충 걸쳐 입고 밖을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특히 한 가닥 두 가닥 셀 수 있을 것 같은 눈썹 사이를 채우지 않고는 외출 불가였다. 가족을 제외하고 친한 친구들은 물론 이름 모르는 사람들의 스쳐 지나가는 시선마저 매우 신경 쓰는 의식 쟁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뭐가 그리 부끄러운 게 많은지 도통 알 수 없는 마음을 때리는 강렬한 문구를 찾았다.


부끄럽다는 것은 속으로 내가 잘 났다고 생각하고 잘난 나를 보여주지 못해 생기는 감정-법륜


 특히 노래 좀 불러보라 하는 상황에 "저는 잘 못 부르는데요" 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을 읽는데 마치 몰래 코를 파다 흠모하던 사람에게 들킨 기분이랄까, 나란 인간이 부끄러운 생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마저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이상이 저어 어기 높은데 있어 부끄럽다는 말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곤 한다.


 덜 부끄럽게 살아가기 위해 나만이 볼 수 있는 글에다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증명해보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나라게 못난 구석을 써 내려갈수록 더 나은 놈이 되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솔직한 감정 속을 실컷 유영하다 나오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저 밑바닥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가 한가득인 데다가 미친년 발광하듯 난리를 쳐대면 흙탕물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생활을 영위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모래가 가라앉아 운이 좋을 때는 흩어진 나부랭이들 사이를 비집고 무언가 반짝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끄러운 날들이 계속되면 자기 전에 아무래도 완독하기 어려울 것 같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머리맡에 둔다. 책 표지 은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오래도록 부끄러운 삶을 살 예정이지만 이따금 내가 아무것도 아니 된 순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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