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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24. 2021

여행뽕 맞고

망고스틴


 으노는 대학 동기이자 가짜 미니멀리스트 동지이고 나의 요리 센세로써 특급 레시피를 구글 문서로 공유해주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 어느 날 으노가 카톡으로 김알파카라는 유튜버의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아직도 가짜 미니멀 라이프가 판을 치고 있다. 모두 까기 St. 미니멀 라이프 비판 2탄>이라는 링크 공유 밑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 사람 왜케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니멀 라이프 준비물: 32평 아파트, 그다음 할 일: 마샬 스피커에 느린 음악 틀어놓고 레이스 앞치마 입고 아보카도 자르깈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현웃 터짐ㅋㅋㅋㅋㅋ 너 곤도 마리에(일본의 미니멀리스트 선구자격인 아줌마) 쇼핑몰 낸 거 알고 있었어??? 올해 최대 쇼킹. 주말에 집 정리한다고 한바탕 뒤집은 사람으로서 뚝배기에 경종을 울리는 영상이다"


그녀의 스포에 이미 영상을 다 본 것 같았지만 구미가 당겼다. 스포를 듣고 보아도 촌철살인의 가짜 미니멀리스트 까기는 흥미롭고 뜨끔했지만 압권은 추천으로 올라온 다음 영상이었다.

 <30대 인생 조지는 테크트리 40대에 후회 없는 삶을 위해>


그녀가 말하는 인생 조지는 7가지 테크트리를 대체로 야무지게 실행하며 살아온 나였지만 유독 찔리는 몇 가지는 이러하다. 아직 꿈 타령하는 30대 히피, 과거 해외여행 마니아, 취미 부자인 편.

구차하게 조용히 변명을 하자면 쥐꼬리만큼이지만 따박따박 들어오는 고정수입은 있고, 분수에는 넘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최저비용 찾아가며 여행을 해왔고, 진로 탐색을 위해 몇 가지 취미를 가져본 적도 있다. 그러나 이유 불문하고 그 끝에는 개털이 된 은행계좌가 있다. 깊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다.


개털이 되는데 크게 일조한 것은 아무래도 돈이 모일까 싶으면 떠났던 여행이 차지하는 부분이 컸다. 오랜 기간 경제 지능이 밑바닥이라 저축은 일단 제치고 허고 많은 소비들 중 왜 여행이었을까. 아무래도 나는 여행뽕을 맞았던 것이다.


 그 시초에는 중이병 말기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류시화, 한비야의 책들이 있었고 고전보다는 쉬이 읽혔던 수많은 여행서적들이 있었다. 가지각색의 여행서를 읽으며 나만의 요약을 해볼 수 있었다.

두 다리 탄탄할 때 국토종단을 시작으로 동남아 배낭여행, 인도 바라나시는 필수, 조미료 같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쿠바 찍고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정도 다녀온 뒤 여건이 되면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 더 떠나볼 요량이 남아있다면 아마존, 남극처럼 오지 중에서도 오지는 선택사항.


20대가 되고 일 년에 한 번씩은 어디든 떠나본다는 계획을 세운 뒤 각가지 노동의 장르를 체험해 보았다.

대학생 때 알바를 구하지 못해 폐인처럼 노트북을 돌려세워 한 달 내내 영화만 보았던 단 한 번의 방학을 제외하고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촌의 오래된 카페를 시작으로 홍대 놀이터 앞 인도 레스토랑, 잠원동의 영어공부방 보조교사, 극장 조명 셋업 및 철거와 오퍼레이터, 뮤지컬 핀 조명 팔로우, 한복 맞춤 샵, 쇼핑몰, 공연 소품 제작 등 신중하게, 어느 때는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받아들였다.


 천장까지 쌓인 한복 상자를 매일 정리하다 주로 주부들이 겪는다는 손목터널 증후군이 심하게 와서 몇 주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역대급 무더위로 40도에 임박하는 뙤약볕 아래 건장한 이십 대 남자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는 야외공연 소품팀에서 양아치 같은 대표의 술수에 넘어가 단기 고용된 사람들보다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공연 끝까지 소품을 책임져야 했던 적도 있었다. 거기에 서비스직 종사자라면 한 번씩은 겪어볼 만한 진상들 때문에 터졌던 울음을 제외하고는 좋은 인연을 두루 만들고 떠나게 될 여행을 준비하며 대체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호시탐탐 노리던 가까운 나라들을 떠나보다 스물두 살 휴학을 하고 떠났던 몰타에서의 반년살이가 집을 떠난 인생 첫 장거리이자 장기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어학연수를 빙자한 타향살이, 독립이 의미가 컸기 때문에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여행뽕을 제대로 맞게 된 곳은 스물일곱 퇴사한 뒤 떠났던 동남아 배낭여행이었다. 동갑내기지만 회사의 권유로 서로 존댓말을 쓰고 있었던 전 직장동료 보라씨와 나의 남동생 박슈, 이렇게 요상한 조합 세명이 팔천 원이면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던 카오산로드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떨어졌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며칠 묵으며 밤마다 터줏대감처럼 장기 투숙하는 아재들의 추천 여행지와 조심해야 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카오산로드가 서양 그지들의 소굴이라고 비아냥 거리면서도 세상 잡다한 것들이 공존하는 동남아 배낭여행의 허브 속에 오래도록 몸을 맡기고 있었다. 숙소 근처 들락날락거리던 재즈바도 지겨워질 즈음 우린 방비엥으로 떠났다.


동남아 여행지 안에서도 배낭여행으로 흥하는 지역은  마리화나를 쉬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바뀐다고 누군가 말했다. 태국 북부지역의 빠이라던가, 라오스의 방비엥 또한 서양넘들이 쉬이 마리화나를 구할 수 있어 몇 년 전까지 미쳐 날뛰던 곳이었는데 사고가 많이 생겨 단속이 심해진 뒤 많이 한가로워졌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법망이 허술한 미얀마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라며 믿거나 말거나 떠들어대는 여행자들의 말들이 항상 흥미로웠다.


 어딜 가나 여행 베테랑들이 있었고 현지 맥주에 시장에서 산 안주거리에 밤마다 오밀조밀 모여서 각자의 여행담을 털어냈다.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으로 차마고도의 짐꾼들과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맨 정신에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한 절벽 위의 길을 걸었다던 순수한 눈빛의 젊은이, 시체를 태우는 의식인 뿌자에 꽂혀서 매일 그것을 보느라 그 동네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수개월 바라나시에 박혀냈던 좀비 같은 청년 (제일 이상했던 이 사람은 훗날 보라씨의 남편이 되었다.)


또 자신들의 여행 중 로맨스도 빠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비엥의 시꺼먼 밤, 눈이 맞은 여행자와 길바닥에서 거사를 치르다 지나가던 개와 눈이 마주쳤는데 '저 개가 나인지, 내가 저 개인지 모르겠더라'라고 생각을 했다던 최강 입담꾼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지나치던 샌드위치 가게 아줌마의 호탕한 표정, 줄을 지어 따라오는 개미를 덤으로 받을 수 있는 달콤한 망고스틴, 멀리서 들려오는 흐르는 물소리와 머리 위의 새소리, 진흙 공만으로도 꺄르륵 웃으며 놀고 있는 라오스 아이들까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소소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었지만  결국  맥주 한 모금 들어가면 술술 나오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행복을 넘어 끊기 어려운 중독이 되어갔다.

 

일상으로 복귀하고 다시 취업을 했다. 새로운 사수에게 “잘 알려주세요. 열심히 해볼게요"라고 말했다. “일을 알아서 해내야지. 여기가 학교는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하는 역대급 ㅆㄴ과 일하며 정신은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어젯밤 김치찌개를 먹었다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아무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또라이 하루 열두 시간 넘게 붙어있으며 고장이 난 것이다.


 그즈음 퇴근하고 들어온 내게 엄마는 "저녁 먹었어?"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대뜸 제발 나한테 말 걸지 말라며 난생 안 하던 짓을 했다. 세계여행 관련 다큐를 시청하던 엄마가 고장이난 딸내미를 옆에 불러앉혔다.


"휘주야 세계여행 다녀온 사람들은 행복지수가 높은 편 이래. 너도 일 년 정도 세계여행 다녀올래?"

"일은 어떻게 하고. 이제 부지런히 저축해 보라며"

"내가 줄게. 너 여행 보내줄 돈은 있지. 나 돈 모으는 게 취미잖아."

엄마의 표정이 비장했고 진심이었다.


 아빠와 이혼을 한 뒤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한 달에 두어 번 쉬어가며 식당에서 일을 했던 엄마였다. 힘든 상황의 불만을 단 한 번도 토로한 적 없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본인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성인군자 AI처럼 말했다. 그럴 때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뭐야 도덕 교과서야? 장난하는 건가?'싶었지만 엄마의 태도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씩씩했다. 그렇게 미술학원을 보내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는데 그마저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이제는 나를 세계여행까지 보내줄 참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강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자식한테 생선 잡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생선을 가져다주면 안 된다며. 이게 바로 자식새끼한테 생선 가져다 바치는 꼴이야. 엄마 덕에 대학 다니면서 등록금 걱정 안 하고 아르바이트하는 대로 일 년에 한 번씩은 해외에 나갔잖아. 몰타에도 꽤 있었고. 다 합치면 거의 일 년이야. 행복지수 높아. 높아서 탈이야. 만족이 너무 빨라서 욕심이 없어. 욕심이 없으니 발전도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 요즘 회사에 또라이 때문에 잠깐 힘든 거야. 그러니까 말만으로도 됐어. 희선아. 너나 제발 여행 좀 가. 알겠니? "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래도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그렇게 여행 뽕은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지만 철딱서니 없는 나는 여전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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