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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24. 2021

나의 전부

사과



온 가족이 함께 사과밭에 있다.

새마을 마크가 있는 초록 모자를 쓰고 있는 큰아빠는 장화를 신고 사과 수확을 위해 온 가족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엄마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 여기저기 들쑤시며 관찰을 하기 시작한다.


 붉은 갈색 사다리를 타고 색종이질 할 때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묵직하고 날은 짧지만 날카로운 가위로 조심히 사과의 꼭지를  자른다. 비닐로 된 망태기에 사과를 집어넣고 가득 쌓이면 폭신한 땅 위에 펼쳐놓은 큰 비닐 위로 살포시 쏟는다. 빨간 사과들이 쌓이고 사과탑에서 떨어진 사과는 주변을 뒹굴거린다. 상처 없는 예쁜 사과들을 노란 사과박스에 옮겨 담는다.


아마도 나는 여섯 살이거나 일곱 살 일 것이다. 사과상자에 적은 큰아빠 이름 석자가 삐뚤빼뚤한데 글씨도 잘 쓴다 하셨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망태기를 들고 나르느라 꽤나 힘들고 칭찬도 배부르게 먹었다.


이제 심심하고 지루하다. 버려진 사과들을 본다. 꺼멓게 절반이 섞은 사과들은 가차 없이 버려진다. 내심 아까우면서도 아낌없이 상한 사과를 버릴 수 있을 만큼 끝없이 생기는 사과를 서울에 가서 친구들에게 어서 자랑하고 싶다.


사과는 주근깨 같은 점도 있고 덜 익은 연둣빛부터 맛이 좋을 것만 같은 샛노란 색에서 시뻘건 색까지 하나의 사과는 총천연색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나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독사과처럼 시뻘겋고 반짝이는 사과가 갖고 싶다.


햇빛을 잘 받은 꼭대기에 있는 사과가 예쁘다는 소릴 듣고 겁 없이 나무를 올라타 고개를 들고 잎사귀 사이 부서지는 햇살을 피해 사과를 찾는다. 찾았다. 가장 꼭대기의 빨간 사과.


 만족스러운 수확물 하나를 하루 종일 배꼽 즈음에 대고 옷으로 문지른다. 닳아 없어질까 걱정이 되자 광내는 것을 멈추고 너무 예쁘지 않느냐며 가족들에게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른들은 아무래도 흥미가 없는지 "그래. 예쁘다" 하고 금세 하던 일을 마저 한다. 이전 같으면 서운했을 테지만 짧은 대답마저 만족스럽다.


그날 나는 그 반짝이는 사과를 분신처럼 종일 지니고 있었다. 해가지고 사과에 대한 애정이 사라질 무렵 한 입 베어 먹었다. 푸석하다. 푸석해도 좋다.

 


Q)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세례성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던 과정에서 나왔던 질문이었다. 몇 분 고민을 하다 불쑥 사과밭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많고 많은 좋은 날 중에 왜 사과를 따던 날이 떠오르다니. 더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는지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그날만 할까 싶었다.


 어릴 적 아빠는 사업이 잘 풀리며 밖으로 도는 일이 많았고 엄마와 싸우는 날이 잦아졌지만 일 년에 두 번 명절마다 가는 아빠의 고향 김천에서는 다툼이 없는 천국이었다. 아빠의 세 형제는 우애가 좋았고 형제들의 배필들은 하나같이 묵묵히 제 할 일을 잘 해내는 여자들이었다. 사촌언니, 오빠들은 양보도 잘하고 세 잎 클로버로 왕관을 만들어주거나 집 밖에 있는 공포의 화장실에 갈 때면 앞에 서서 노래를 불러주다가 멈추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매일 다투던 남동생 나부랭이보단 좋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천동이라는 마을의 가장 꼭대기 집.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넘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온갖 식물들과 사랑하는 과일이 창고에 한 가득이었다. 사과 창고의 묵직한 문을 열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철 지난 사과가 늙어가는 냄새와 최근에 수확한 사과의 풋풋한 냄새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사과 창고 특유의 향마저 그렇게 좋았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먹은 과일도 사과일 테지만 유년의 기억 때문인지 사과는 수많은 과일들 중의 내겐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과일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약한 기관지 때문에 싫어하는 순간이 가끔 있다.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를 향할 때 텁텁한 입안과 목젖 넘어 따끔한 통증을 느끼곤 한다. 거울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나의 추레한 행색은 덤이다. 냉장고 문을 열고 사과 한 알을 꺼내 과도를 찾아들어 익숙하게 사사삭 사과의 껍질을 도려낸다. 한 조각 잘라내어 한 입 베어 물면 시원한 수분기 터지는 사과의 속살이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도록 해준다.


아침 사과는 금메달, 점심 사과는 은메달, 저녁 사과는 동메달  -사과예찬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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