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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샤 Oct 24. 2021

할매의 꽃상여

홍시

오래전 SBS MC 이경규가 진행하는 힐링캠프에 처음 임지호 셰프가 출연한 편을 보던 때가 생생히 기억난다.  

"저 사람은 셰프가 아니고 예술가네 예술가야!"

"와 아티스트다......"

유독 엄마와 TV를 볼 때 말이 많아지는 편인데 그날은 그저 감탄을 연발했다.


 그가 만든 음식의 맛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임지호란 사람의 인생에 대해 지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종종 그의 이름을 검색하며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어딘가 레스토랑을 내지는 않았을까. 잘 사고는 있을까. 만나본 적 없는 그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치 가까운 지인이 주연인 영화가 개봉하는 것처럼 들떠 당장 보러 가자고 했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영화관에서 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최근 집에서 결제해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좋아서 요리를 했다던 그의 모습을 보며 예기치 못하게 시작부터 눈물이 발사되었다. 임지호 본인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일 수도 있는 전국의 방방곡곡, 특히 산골마을에 사는 할매들의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껏 밥을 지어 드린다. 지리산의 깊은 산골 마을, 요리를 하기 위해 돌에 낀 이끼를 떼는 임지호에게 돌옷도 먹을 수 있냐며 신기해하는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나의 돌아가신 할머니와 닮았다. 비녀를 꽂아 넣은 쪽진 머리와 몸빼바지, 분홍색 상의, 웃는 모습까지 영화를 보는 내내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엄마가 버리려고 내놓은 일회용 기저귀를 할머니가 전부 빨아서 빨래처럼 널어놓았다 하셨을 만큼 옛날 할머니 오브 할머니였다. 늦둥이 막내였던 아비 덕에 내겐 증조할머니 격의 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알게  사실인데 손주  가장 막내였던 남동생은 할머니가 가끔씩 불러다가 고쟁이 바지에서 만원을 꺼내 몰래 주었다고 한다. 뒤늦은 배신감이 들었지만 1919년생 할머니의 1990년생 막내의 막내 손주는 얼마나 귀여웠을지 그럴 만도 했다. '손주들 중에 기왕 고추가 좋으셨겠지. "" 하다가도 나의 기억이 존재할 만큼 컸을  기력도 없는 할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시골집 앞마당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그때보다  노쇠해진 할머니 등에 남동생은 업혀본 일이 많지 않았을 테니 할머니의 사랑은 공평했다고  홀로 퉁치기로 했다.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큰아버지댁을 한옥에서 신식 집으로 고치는 동안 간이 화장실에서 씻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화장실이 어두웠는지 마당에 나와 놋으로 만든 방짜 대야에 숱 없는 길고 가벼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물로 헹구어 내었다. 살짝 고개를 사선으로 갸우뚱한 채 머리카락을 가슴 앞으로 모은 다음 참빗으로 쓸어내렸다. 거기에다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옥색 비녀를  꽂아 넣는 모습까지 신기해서 졸졸 쫓아다니며 바라보았다. 내가 사용하던 플라스틱 세숫대야, 플라스틱 빗, 플라스틱 머리핀에 비해 할머니의 소품들은 고풍스러웠다. 쪽진 머리만 하고 있던 할머니가 말도 안 되게 긴 머리를 풀어헤친 생경한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저 시골 마을의 할머니였던 사람이 어린 내게도 여자 사람으로 보이던 그 순간, 어리지만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할 때면 땅에 갓 떨어진 홍시를 주워 성한 부분만 잘 발라내어 입에 넣어 주시곤 했다. 씨를 감싸는 부분의 오독오독한 식감이 좋았다. 지금에야 갓 떨어진 과일이 얼마나 달큼한지 잘 알지만  당시에는 할머니는 나를 예뻐하면서 왜 땅에 떨어진 홍시를 주는 것인지 조금 의아했다.


 

 좀 더 성한 홍시를 먹고 싶어 대나무에 양파망을 달아놓은 긴 잠자리채 같은 도구로 감을 따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옆에서 할머니는 까치밥도 남겨야 하니 적당히 따라고 하셨다. 지금에야 오염이니 뭐니 해서 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산소에 가서 고시레 한다며 주변에 동물들의 먹이를 던지고 오는 것도 신기해 꼭 내가 하려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평생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니고 일 년에 두어 번 보았기에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은 무거웠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만 아빠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고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썩이던 모습과 발인을 하며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절을 하며 할머니가 주던 모나카가 생각이 나 많이 울었다. 모나카를 먹으라는 핑계로 수시로 방문을 열고 손주들이 정신없이 노는 모습을 들여다보곤 하셨다. 더 어릴 적에야 유가 사탕으로 우릴 무릎에 앉힐 수 있었으나 할머니는 더 줄 것이 없었다. 매번 아쉬워하며 방문을 닫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처럼 꽃상여를 타고  그의 옆으로 가셨다. 아마도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꽃상여라 생각했다. 습자지로 만든 총천연색 꽃들이 뒤덮고 있는 꽃상여는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뒤를 온 가족이 따라갔다. 이제는 우리가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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