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9코스
수서역에서 시작해서 양재시민의 숲역에서 마치는 서울 둘레길 9코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입니다. 가볍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숲이 가득한 이 길은 한 여름에 걸어도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려줘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평일에 이 길을 걸으니 무척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네 명이 모여 걷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그랜마님은 9년 전에 안나푸르나를 다녀오신 걷기 경험이 풍부한 분입니다. 렛고님과 Soo님은 이미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난 걷기의 달인입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걸으니 걷는 재미가 좋습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상관없이 속도를 얼마든지 조절하며 걸을 수 있고, 오늘 걷는 전체 거리도 그다지 길지 않은 길이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걷습니다.
중간에 30분 정도 침묵 걷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꼭 해야 된다는 것은 없지만, 길이 너무 좋아 그냥 떠들고 걷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명상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명품길입니다. 이런 길을 걸을 때에는 길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 자연에 대한 예의입니다. 걸으며 발의 감각에 집중합니다. 때로는 스틱이 지면과 부딪치는 소리도 듣고, 그 충격이 손목과 어깨에 전달되는 감각도 느낍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에는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리막길을 걸을 때에는 발을 디딜 때 조심하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을 느낍니다. 가능하면 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감각에 집중하려 노력하며 걷습니다. 그래도 한평생 생각에 빠져 살아온 관성 때문에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순간순간 감각에 집중하며 이 순간만이라도 생각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하며 걷습니다. 30분간의 침묵 걷기 중 감각에 집중한 시간은 아마 20% 내외일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낮을 것 같습니다만, 노력한 것에 가산점을 주어 20%라고 우기고 싶습니다.
휴식 시간에 준비해 온 과일과 간식을 먹습니다. 옷과 모자에 자벌레 같은 벌레가 붙어있습니다. 손가락으로 튕겨서 떼어냈습니다. 산길을 모두 마치고 내려와서 옷이나 모자에 붙어있는 벌레들을 확인하며 다시 손가락으로 무지막지하게 쳐냅니다. 그리고 걷다가 아차!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벌레들은 손가락의 힘에 의해 또 튕겨져 나가는 힘에 의해 죽었을 것입니다. 살생을 저지른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집어서 땅에 내려놓아도 되는데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떼어내는 것이 급해서 저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저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다친 벌레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코스가 변경되었습니다. 특히 산길에서 내려와 여의천을 걷는데 개천의 진입로가 공사로 인해 변경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리본이 길을 잘 안내하고 있어서 개천으로 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도니님이 매현시민의 숲 부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전에 피클볼 수업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참석했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언제 만나도 반갑고 마치 어제 만난 듯 편안합니다. 뒤풀이를 하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갑니다. 처음 나오신 그랜마님도 즐겁게 대화에 동참하시며 뒤풀이 끝까지 참석하는 성의를 보여주셨습니다.
뒤풀이 2차로 커피숍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이어갑니다. 특별한 얘기는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며 서로를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찻집에서 나오며 근처 과일가게의 과일이 매우 싸다고 구입해서 몇 개를 제게 나눠줍니다. 배낭 무게는 무거워졌지만, 걸음걸이는 가벼워졌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주는 선물을 마다하지 않는 뻔뻔함도 있습니다. 주는 마음 고맙고, 받는 마음 즐겁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뭔가 나눠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함께 걸어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