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무겁습니다. 어젯밤에 잠을 설친 여파가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여파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몸의 사소한 부분이 불편하면 온몸 전체의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일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금방 몸에 무리라는 신호가 옵니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입니다. 늘 하듯이 자신의 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또한 사소한 일로 마음을 빼앗기거나 일상의 단순함을 잃게 되면 금방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며 동시에 몸의 피로를 느낍니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 심신이 금방 피곤해집니다. 그만큼 화의 에너지는 큽니다. 노화 현상 중 좋은 것 하나는 화를 낼만한 에너지가 없어서 화를 내고 싶은 만큼 내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한 화 낼 일도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됩니다.
후배가 카톡으로 장난스러운 동영상을 보내오며 테슬라 자동차 얘기를 합니다. 나는 걷는 사람이기에 자동차가 별로 필요하지 않고 관심 없다고 하니, 자격지심이라고 저를 떠봅니다. 이제는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조차 없다고 하니, 이 또한 자격지심이라고 일부러 약 올립니다. 그런 상황이 화를 내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재미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70을 곧 바라보는 나이에 자격지심을 느낄 일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다섯 명이 모여 길을 걷습니다. 봄은 사라지고 여름이 선뜻 찾아왔습니다. 덥습니다. 걷기 학교는 여름 방학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없다고 답합니다. 이날, 저 날 빼고 나면 걸을 날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걷기 학교는 걷기 위해 모인 학교입니다. 날씨와 상관없이 걷습니다. 그리고 날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날씨와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무더운 날씨, 추운 날씨로 인한 감정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냥 무덥다, 춥다는 감각만 느낍니다. 감각은 감각으로 끝날뿐입니다. 다만 감각이 감정으로 변화되면 그 감정의 불길을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걷기 학교가 학교인 이유는 바로 이런 점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분이 신고식으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셔서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고식이 아니고 그냥 사고 싶으셔서 사신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셔서 감사히 먹었습니다. 신고식은 걷기 학교에는 없는 단어입니다. 가능하면 1/n의 원칙으로 먹고 마신 금액을 균등하게 나눕니다. 서로에 대한 부담도 없애고, 자신에 대한 존재감은 유지하고, 각자 자신의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오래갑니다. 한 분이 식사를 대접하시니 다른 분이 오랜만에 나오셨다고 커피를 대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나오셔서 미안해서 사시겠다고 했으면 제가 반대했을 겁니다. 그분은 반가운 마음을 커피로 표현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눕니다. 살아가는 모습은 대동소이합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우리의 가치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삶의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고, 가치가 달라지면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시각이 변합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 지녀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진리입니다.
길을 걸으며 길과 길벗과 자신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걷기는 성찰의 좋은 수단입니다. 그리고 길벗과 걸으며 성찰을 체득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체득이 변화입니다. 변화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상황과 경계에 부딪치면 예전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체득이 아직 덜 된 것입니다. 설 익은 밥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 자채만으로 이미 큰 소득입니다. 자신을 반조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그 반조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걷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이 모든 것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상에 불과합니다. 허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길벗이 좋은 말씀을 합니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이론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이론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불교의 유식과 같고, 불교 자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 심오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거나 괴롭다면 이 역시 모두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꿈을 깨면 사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꿈속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이룬 모든 성취는 깨는 순간 의미를 상실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은 호흡과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우리는 지금-여기로 돌아오는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생각하는 현실이 허상임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할 일을 합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걷습니다. 걷는 것이 오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