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에크하트 톨레의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읽었습니다. 그 책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기에, 그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이런 인연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은 시종일관 거짓된 자아에 속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얘기합니다. 저자는 에고를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창조된 거짓된 자아’라고 한 마디로 정의합니다. 이 한 문장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무의식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각성되지 않은 상태,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언행이나 사고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무의식은 우리의 전생, 문화적 환경, 양육 환경, 경험을 통한 생각과 감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무의식이 바탕이 되어 현재의 언행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다시 무의식에 저장 되어 생각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습관적인 모습들은 모두 무의식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무의식이 바로 자신이 아니라는 자각이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입니다.
저자는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마음은 과거 역사의 산물에 불과하고,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지 않는 한 무의식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손아귀는 바로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왜곡된 시각과 관점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식이 모여 만들어 낸 거짓 자아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환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자아는 흘러간 과거가 만들어 낸 부산물에 불과하지만, 자각을 하지 못하면 일생 동안 주인 노릇을 하며 우리를 괴롭힙니다. 과거가 현재를 힘들게 만들고,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는 미래를 힘들게 만듭니다. 거짓 주인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고, 참 주인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참주인은 거짓 자아인 마음 너머에 있습니다. 그 마음에 끌려 다니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볼 때 서서히 존재를 드러냅니다. 저자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지켜보는 자’가 참 주인이고, 현존하는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과거를 용해해서 순수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마음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머릿속 목소리’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고 하며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또한 ‘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며 ‘머릿속 목소리’를 적으로 간주하라고 얘기합니다. 무의식 상태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마치 쇠사슬처럼 연관된 생각들이 떠오르며 생명력과 활동력을 갖고 설치게 됩니다. 그런 생각에 끌려 다니지 말고 ‘바라보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간화선을 수행하시는 선승들이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화두를 들 때, 말에 빠지지 말고 화두를 지켜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화두 자체는 화두를 보기 위해 필요한 미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녀가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부채를 보지 말고 부채 뒤에 숨겨진 얼굴을 보아야 한다.’고.
어떤 마음이나 생각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짓 자아가 만들어 낸 사기 놀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자신의 모습을 강화하고 드러내려고 합니다. 고통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 ‘ 그 뜻은, ‘모든 현상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바로 저자가 책에서 얘기한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르더라도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바라보는 것, 그 길만이 우리가 무의식, 즉 거짓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 상황을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사회적 지위, 외모, 능력, 경제력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그런 위치와 모습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종이 주인을 부리는 모습입니다. 그런 외형적인 모습들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저절로 변하고 사라집니다. 무상(無常)입니다. 실체가 없는 물거품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의 외모는 매 순간 노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세월 앞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력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상함에 집착을 함으로써 스스로 괴로움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성, 불성, 본래면목 등으로 불리는 ‘참 자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따름입니다. 거짓 자아로 높고 두껍게 벽을 둘러쌓아서 보이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 지점이 우리가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지점입니다. 높은 벽을 본 순간 바로 그 벽이 환영임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벽은 저절로 무너지며, ‘참 자아’가 저절로 나타납니다. 저자는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일깨워주기 위해 거기 존재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번뇌가 보리(菩提), 즉 깨달음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이 바로 해탈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번뇌와 해탈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의식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가장 심오한 의식은 인식의 오류에 의해 절대 영향을 받지 않는 반면, 마음은 늘 개념 분별과 인식의 오류의 영향을 받는다.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