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빗 속을 걸어서 트레킹화가 흠뻑 젖었다. 습기 제거를 위해 신문지를 말아서 신발 안에 쑤셔 넣으며 산티아고 추억이 떠올랐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큰 비를 네 번 정도 맞았던 것 같다. 옷을 말리는 것도 큰일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신발을 말리는 일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신문지를 구해 먼저 신발부터 챙긴다. 그다음이 샤워하며 빨래를 한다. 운 좋으면 건조기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내게 그런 행운은 거의 없었다. 대충 빨아서 침대 옆에 널거나 빨랫줄에 널어서 말리거나 아니면 축축한 상태로 비닐봉지에 싸서 다음 날 알베르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빨래를 하기도 한다. 걷는 사람에게 발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기에 발 보호를 위해 신발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젖은 트레킹화가 약 4년 전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추억을 소환시켜 주었다.
다시 갈 수 있을까? 산티아고의 다른 루트를 걸어볼까? 과연 가능할까? 걷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걸으며 발생하는 불편함을 지난번처럼 아무 일 아닌 듯 받아들이며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어쩌면 너무 편안함에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불편함을 감수하며 걷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한다. 편안함에 몸과 마음이 익숙해진 탓이다. 지방에 걸으려 갈 때에도 가능하면 편안한 기차나 교통편을 이용하고 싶고, 숙소도 조금 편안한 곳에서 머물고 싶다. 서울에서 길을 걸을 때에도 높낮이가 심한 산길은 피하고 싶고, 그저 평탄한 평지만 걷고 싶다. 그래서 집 주변의 길을 걸을 때에도 다른 길을 찾아 걸으며 좋아하는 코스를 찾기도 한다. 인적이 드물고, 높낮이가 적당하고 조용한 오솔길을 좋아한다. 그런 길은 밤새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최근 호주에는 농장을 벗어나 야생에서 살다 발견되어 ‘바락(Barrack)’이라는 이름을 얻은 메리노 양(羊)이 화제다. 그동안 자란 털 무게가 자그마치 35kg에 달한다. 양은 철 따라 자연스레 털갈이를 하지만 가축화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자기 맘대로 털갈이를 못하도록 우리가 그들을 길들인 것이다. 길들임의 저주가 질기고 깊다. (조선일보, 최재천 교수, 길들임의 저주)
야생에서 자라던 동물들이 길들여져서 타고난 기능과 본능을 상실하며 살아간다. 가끔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이나 사파리라고 만들어 놓은 넓은 울타리에 갇힌 동물들을 보면서 인간의 장난감이나 노리개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기둥에 묶어서 키운 코끼리는 묶었던 줄을 풀어도 기둥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좁은 반경 내에서 평생 움직여왔던 코끼리는 그 범위 내에서만 살아가야만 하는 불쌍한 동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불쌍한 동물이다. 코끼리는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그 범위를 한 발짝만이라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면 두 발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더 나아가고 싶은 열정이 생긴다. 길들임은 모든 존재를 약하게 만든다. 모든 존재는 태어난 순간부터 각자 존재 가치가 있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무가 동물의 삶을 살거나, 동물이 인간의 삶을 살면 안 되고 또한 살 수도 없다. 각자 태어난 이유가 있듯이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와 방식이 있다. 어느 누구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어제 빗 속을 걸었던 것은 어쩌면 내 안에서 나를 유혹하고자 하는 편안함에 대한 거스름일 수도 있다. 소파에 누워 편안하게 TV를 보거나 맥주 한잔 마시며 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안일함과 편안함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더 컸던 것 같다. 며칠간 사위가 손녀가 머물다 가면서 루틴이 깨졌지만, 그 루틴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안일함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루틴 만들기’이다. 안일함과 무료함, 무기력은 바로 길들임에서 나온다. 좋은 습관에 길들이느냐, 아니면 나쁜 습관에 길들이느냐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루틴을 만들면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며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요즘 코로나의 장기화로 우울이나 불안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의 비율이 네 배쯤 증가했다는 미국의 보건 통계가 있다. (조선일보, 20210302) ‘운동’과 ‘사회적 상호작용’이 줄어든 이유로 인해 발생한 현상들이다. 국내에서는 코로나의 장기화로 성인과 아동 모두 비만이 증가하고 있다. 운동 부족과 배달 음식의 영향일 수도 있다. 황혼 이혼도 증가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체 이혼 건수는 전년보다 4319건이 줄었는데, 유독 20년 차 이상 부부의 이혼 건수는 2894건이 늘어났다고 한다. 반드시 코로나 영향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티베트어로 ‘사람’의 의미는 ‘걷는 자’라고 한다. 두 발로 걷는 존재가 사람이다. 누워 지내거나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는 존재가 아닌,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이 누워 지내거나 집안에만 있으면 원래 존재의 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 또 존재의 기능을 잘 발휘하기 위해서 걷는 것을 루틴 화하며 지낸다.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대로는 홀로 걷는다. 어제 신었던 트레킹화를 들어보니 무겁게 느껴진다. 빗물에 젖은 운동화 무게는 당연히 원래의 무게보다 무거울 것이다. 하지만, 빗 속을 걸으며 신발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발의 무게보다는 길들임을 벗어난 자유가 준 영혼의 가벼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