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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Mar 17. 2024

걷기란 생활의 작은 기쁨이다 (베네피)

걷기란?

 숲 속에서 한 인간이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듯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버린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얼마 동안을 살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숲 속에는 영원한 젊음이 존재한다. (....) 그곳에서 나는 그 어떤 일도, 불행도, 불운도 내게 일어날 수 없다고 느낀다. 풀도 없고 나무도 없는 땅 위에 선 채 유쾌한 대기 속에 얼굴을 담그고 무한한 공간 속에 솟아 있으면 우리의 쩨쩨한 에고이즘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본다. (랠프 윌도 에머슨)     

 퇴근 시간에 맞춰 그의 회사 근처인 선바위역 부근 커피숍으로 나갔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 주는 바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니 괜히 내가 더 미안해졌다. 검은 모자, 진한 갈색의 점퍼를 걸치고, 청바지와 검은색 등산화를 신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얼굴에 지친 모습이 느껴져서 빨리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 동호회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지만, 그를 오랜만에 만났다.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오랫동안 얼굴을 보거나 얘기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6년 전 걷기 동호회 모임에서였다. 그 당시 그의 모습은 어두워 보였다. 말도 거의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표정도 무표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동호회 카페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고 읽으며 그의 단순함, 낭만, 정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쓴 글을 자주 읽고, 어떨 때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사진은 찍는 사람의 마음을 투영한다고 한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내면이 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과 사진에서는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말과 글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약간 내성적인 그는 말로 의견을 표현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서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분명하고 확실한 삶의 철학과 기준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지금 외국 법인 생활용품 대리점에서 근무하며 큰 마트나 슈퍼마켓 등에 제품 운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예전에는 매장 관리나 영업도 했지만, 요즘은 배송 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직원이 15명 이상 되었는데, 요즘은 일거리가 줄어서 인원이 세 명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직도 해고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퇴사한 동료들에게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직장 생활은 N 패션에서 매장 관리 및 납품 업무를 8년 정도 근무했고, 회사 파산으로 인해 지금 회사로 이직한 지 22년이 지났다. 납품하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매장 점주들이 좋은 제품을 받아서 팔면서도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것도 나이 어린 젊은 점주들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면서 자존심이 상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제품 운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차를 대로변에 세울 경우가 많은데, 주차 위반으로 스티커를 받게 되어 맥이 빠진 경우도 많이 있었다. 주차할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서 경찰서로 보내면 할인해 주기도 하지만, 이 또한 배송 업무를 담당하는 그에게는 큰 스트레스다.    

 

 그는 걷기 동호회 가입 전 블로거로 활동했다. 어느 날 이웃 중 한 사람이 배낭 메고 걷는 사람의 뒷모습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사진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 이웃에게 소개받아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걷기 동호회 ‘걷기 마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독신으로 지내다 보니 재미도 없고, 웃을 일도 별로 없고, 얘기할 상대도 없었다. 업무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집 콕’만 하며 보냈었다. 원래 조용하고, 소심하고, 말 수도 적은 그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걷기 동호회 가입 후 눈팅만 하다가 2014년 10월 21일에 처음 걷기 모임에 나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걷기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참석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이 그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시점이기에 기억에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역시 걷기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그날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게 특별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쩌면 과거 자신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된 날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가입한 후 꾸준히 활동하면서 ‘길 안내자’로 활동하고 있고, 몇 년간 활동한 후에는 ‘걷기 마당’의 ‘매니저’로 1년간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걷기 마당’ 가입하기 전에 집돌이로 살아왔다. 히키코모리는 아니었지만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기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홀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막걸리 한잔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걷기 모임에 참가하면서 그간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걷는 그런 환경과 분위기가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세계’로 느껴졌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가입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다가 블로그 이웃의 소개가 인연이 되어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간 살아왔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 편안하고 좋았다. 나중에는 ‘길 안내자’ 역할을 하면서 길을 찾아 나서기도 했고, 그 길을 안내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가 안내한 길을 걸은 후에 회원들이 ‘길이 좋았다’라고 얘기를 하면, 그 말이 주는 기쁨이 컸다.     


 그는 고둥학교 시절 3년 간 아마추어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던 덕분에 누구보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어서 길을 걷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답사 후 걷기 모임 공지를 카페에 올릴 때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길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이끄는 길을 걷게 되면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에게 ‘걷기 좋고 쉬운 길’은 그의 기준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힘든 만큼 인상 깊은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짜릿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안내했던 길 중에 ‘북설악 마장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길이 힘들기도 했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그 길이 너무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한다. 그 역시 답사를 하면서 그 길이 유난히 좋았다고 했다. 그 이후 좋은 길을 다녀온 후에는 길 안내를 자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 길을 안내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든다고 한다.      


 그의 닉네임은 베네피다. 카페 가입하기 위해 닉네임을 결정해야 하는데, 갑자기 배냇저고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젖 냄새가 배어있는 배냇저고리는 순순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의미한다. 부모들은 자식의 배냇저고리를 평생 간직하기도 한다. 걷기 마당이 그에게는 갓 태어난 생명의 소중함과 사랑스러운 의미를 간직한 배냇저고리의 이미지로 느껴질 만큼 그에게는 의미 깊은 모임이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저고리’ 대신 가죽을 뜻하는 ‘피(皮)’를 붙여서 배네피라는 닉네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베네핏 (benefit)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길동무와 길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아름다운 혜택이라고 생각하니, 그 이름으로 불러도 무리는 없다고 얘기한다. 그는 걷기를 시작하면서 큰 혜택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약도 복용하지 않고 있다. 걷기 전에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가스 활명수’를 늘 달고 살았다. 업무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으면서 체질이 변했다.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월요일에 몸이 찌뿌듯했는데, 주말에 답사를 가거나 집 주변을 걸으면 몸이 아주 가벼워진다. 걷기가 생활화되면서 생긴 큰 변화다. 땀을 흘리니 독소도 배출되며 기분도 좋아진다. 마음도 편안해지고 건강해진다. 근력도 생겨나고 생활에 활력도 생긴다. 그래서 ‘걷기’ 자체가 고맙다.”     


 혈압약을 오랫동안 복용해 온 나는 비슷한 연배의 60대 초반인 그가 아무런 약도 복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하다. 그는 건강을 챙기고 활기차게 살기 위해서 걷는다고 했다. 또한 걸으면서 체질이 변했다고 했다. 걷지 않으면 몸이 개운하지 않을 정도로 걷기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걸으며 무엇을 배웠을까? 그는 이 질문에 자신은 인문학적 소양이 없기에 그런 것을 잘 모른다고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우선 마음이 즐겁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좋다. 집에 있으면 답답한데, 밖으로 나오면 그냥 좋다. 바람, 비를 맞고 걸어도 좋고, 우산 쓰고 걸으며 빗소리를 들어도 좋다. 햇빛, 바람, 공기, 풍경이 매일, 매 순간 다르다. 같은 길도, 같은 풍경도 매일, 매 순간 다르게 보이고 느껴진다. 고민은 사라지고 스트레스는 완화되며,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을 안 하게 된다. 걷기 마친 후 집에 돌아와 혼자 막걸리 한잔 마시는 그 기분도 너무 좋다. 길동무들과 나누는 대화도 즐겁다. 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바람을 맞으며 걷는 느낌도 좋다. 머리는 맑아지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다쳐 봐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걸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비 오는 날 한강변을 걷는 날이었다. 그날은 그가 길 안내자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걷다가 멈춰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등산화 밑창이 떨어질 듯 말 듯 벌어져 있었다. 그는 배낭에서 폭이 넓은 접착력이 강한 투명 테이프를 꺼내어 밑창을 등산화와 일심동체가 되게 묶어 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에게 왜 테이프를 넣고 다니는지 물었더니, 자신이 혼자 답사를 하다가 비슷한 경험을 한 후에 누군가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들고 다닌다고 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위한 준비를 늘 하고 다니는 그 마음이 너무 곱다.      


 그는 98년도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한 회사에서 22년간 근무하며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배송 업무를 하며 늘 주차와 사고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고 살아왔다. 매장 점주들의 불합리한 ‘갑질’을 많이 당하기도 했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회상하니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주변을 보니 모든 사람들이 삶의 고통을 참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삶의 과제로 인해 고통 속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걱정거리의 90% 이상은 쓸데없는 고민거리라고 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고민을 미리 하거나, 지난 과거를 반추하며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지금-여기에 살지 못해서 발생하는 괴로움이다. 또한 그 괴로움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고통 속에 매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걸으며 일상 속 스트레스를 털어낸다고 한다. 걸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쓸데없는 고민 대신 좋은 추억과 자연, 길동무와 벗하며 살 수 있다고 했다. 부귀와 명에, 권력을 지닌 자들도 일상의 고민거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고, 고민 속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다. 그는 삶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역설적인 편안함이 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꾸준히 걷고 있다. 그에게 걷기란 무엇일까?     


 “걷기란 생활의 작은 기쁨이다. 집돌이에서 지금의 변화된 모습으로 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생활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고 있으며, 성격도 긍정적으로 많이 변했다. 내향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했으며, 에너지 넘치게 살고 있다. 평생 걷기를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주꾸미 삼겹 볶음과 함께 막걸리 한잔 마셨다. 둘 다 같은 동호회 회원이니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는 걷기와 걷기 동호회 관련 얘기다. 걷기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쑥스러워하는 겸손한 사람과의 격에 맞는 겸손한 술자리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매장 관리하면서 겪었던 힘든 경험을 얘기하는 그에게 나 역시  ‘갑질’당했던 과거의 불쾌한 경험을 얘기하며 전철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걷기를 통한 심신의 평안을 얻고, 지금처럼 건강하고 활기차게 지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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