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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Mar 10. 2024

걷기란 생활의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다  (제제)

걷기란?

 평정이란 곧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걷는 동안의 평정은 또한 모든 근심 걱정과 비극이, 우리의 삶과 육체에 속이 텅 빈 고랑을 파놓는 모든 것이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걷기의 집요한 권태로움은 결국 힘을 소모시키는 지나친 열정으로, 그리고 죽을 정도로 억압된 삶에 대한 혐오로 바뀐다. 그냥 걷는 것이다. 평정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느껴지는 큰 즐거움이다. 그냥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약 1년 전에 걷기 동호회 모임에서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녀에게 걷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왜 걷는가?’라는 주제로 책 발간을 구상 중이었던 시기였다. “몸에 발진이 있어서 걷기 시작했다. 꾸준히 걸으니 발진이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자신감이 생겼고, 걷는 것만으로는 운동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져서 마라톤에 도전할까 생각 중에 있다.” 가볍게 던진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편안하게 드러내며 진지하게 답변해서 순간 당황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질병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그 스트레스 원(源)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여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발진이나 화상이 있을 경우 집 안에만 갇혀 지내며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고통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얘기를 전해주어 용기 내어 밖으로 나와 걷기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 책 발간을 위한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며칠간 고민 후 하지 않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자신의 이야기가 활자화되어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서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그녀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녀의 답변이 기뻤고, 자신의 얘기를 대중에게 노출시키겠다는 그 용기가 고마웠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성향에 대한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얘기가 활자화되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타인들에게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갖고 있다. 그녀 역시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말은 하고 나면 사라지는데, 활자는 남아있게 되고, 활자로 인쇄된 책이 주는 무게감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비중이 더 크다. ‘지인’과 ‘지인 아닌 사람들’과의 경계가 분명한 그녀는 ‘사회적인 나’와 ‘개인적인 나’의 선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틀과 경계를 허물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 가본 길을 걷는 것이 용기가 필요하듯, 익숙함을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은 쉽지 않은 결정이고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 속 익숙한 습관과 패턴에 길들여져서 인간관계를 잃어버린 경험도 있고, 이렇게 살다가는 고립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느끼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런 익숙함의 벽을 넘어보고 싶다고 했다. 늘 걷던 코스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으면 느낌이 다르다. 홀로 걸으며 그 길을 인지하며 걷는 재미는 따라다니며 걷는 재미에 비해 색다르다.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과 그리고 설렘이 있다. 이것 역시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자 도전이다. 마음공부는 ‘익숙한 일을 설익게 만들고, 설익은 일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마음공부를 해 나가기 위한 초발심이 일어났고, 이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2018년 7월에 걷기 동호회에 가입했다. 걷기를 좋아해서 가입 전에도 혼자 걸었지만 꾸준히 걷지는 않았고 잠깐씩 걷는 정도였다. 2016년도에 피부 발진이 시작됐다. 의사도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고 하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으면 나아졌다가 끊으면 다시 발진이 올라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2018년도에 습진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피부과 치료와 운동을 병행하기로 하고 걷기 동호회를 알아보다가 ‘걷기 마당’이라는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주 3회 이상 꾸준히 걸었고,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발진이 올라오는데, 2019년 봄에 약을 끊었는데도 올라오지 않았다. 요즘도 가끔씩 한 두 개 정도의 발진이 올라오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진다. 환우 카페에는 온갖 치료법이 등장하는데, 스스로 내린 결론은 치료와 운동을 병행하며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치료법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녀 스스로 걷기를 통해 질병을 극복한 이 얘기는 많은 환우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걷기 동호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닉네임은 ‘제제’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인 ‘재재’를 사용하고 있다. 가난한 집안 막내인 소년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기발한 장난을 좋아한다. 그런 기질을 지닌 아이가 성장하며 어른과 형제들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를 그려낸 소설이다. 그 소설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 공감을 느끼며 20대부터 사용해 왔다. 그녀는 집안의 장녀이고, 자식이지만 부모님이 어려워하는 자식이었다. 가끔 애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지인들은 이름을 부르지만 ‘재재’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회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부른다. 개인적인 관계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그녀를 ‘재재’라고 부르면 그녀는 자유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걷기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는 흔히 얘기하는 집순이로 살아왔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책을 보거나 집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뭔가 살짝 부족하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집과 회사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왔다 갔다 했고, 사람들도 일과 관련된 사람들만 만났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집 안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용기 내어 걷기 동호회에 가입해서 걷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바운더리가 넓어지게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규칙적으로 걸으면서 활동량이 많아지고 수면 습관의 변화가 생겼다. 보통 새벽 2, 3시경 잠을 자는데, 저녁 걷기에 참석하면서 12시 이전에 취침하게 되었다. 주 3회 이상 정기적으로 걸으면서 생활의 균형이 잡히기 시작했고 치료 효과도 지속되었다.      

 

 길을 걸으며 또 다른 매우 중요한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났다. 행동보다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으로 끝나는 편이었는데, 걷기 시작한 후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스스로 만든 벽을 넘어선 것이다. 고민의 마지막 질문은 늘 같았다. ‘하고 후회하느냐? 아니면 ’ 하지 않고 후회하느냐?’는 질문이다. 시도한 후에는 실패를 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후회할 경우에는 그 찝찝한 감정이 끝까지 남는다. 실패를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말자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그녀에게 생긴 큰 변화다. 길을 걸으며 말 수가 적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걸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웃는 모습과 밝은 톤의 목소리를 자주 들으며 그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가 걷기를 좋아하고, 걷는 순간 행복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스트레스나 생각이 많을 경우 걷는다. 그런 ‘스트레스’라는 심리적 상황과 ‘무한히 걷기’라는 행동의 접점이 주는 힘과 맛이 있다. 걸으면 마음의 뜰을 걷는 느낌이 든다. 자신만의 세상을 걸으면 생각의 거품이 꺼지게 되고 불편한 마음도 가라앉게 된다. 걷기는 신체의 균형과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우리의 삶, 마음, 생각, 몸의 균형을 잡는데 걷기가 최고다. 사회적 환경, 경제적 환경, 개인적 상황 등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몸을 일으켜 현관 밖으로 나오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일단 나오기만 하면 된다. 현관 밖까지 나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나오면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걷기 시작한 후 얼굴과 몸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많이 듣는다. 생기가 있고 힘이 있어 보인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걸으러 나올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좁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좁은 세상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동호회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생각, 느낌, 감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각자 살아온 과정이 다른 자신들만의 얘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의 태도, 말, 행동을 보며 그녀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산에 서 있는 휜 나무가 곧은 나무를 질투하지 않고, 꽃이 동물을 보고 자신과 다르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다양한 동식물들이 모여서 산을 이루고 있다. 만약 산속의 나무가 모두 같은 모양이라면, 꽃이 모두 같은 꽃이라면, 바위 모습이 모두 정육면체라면 그 산을 찾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그런 산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걷기 동호회에서 걷기 시작했지만, 신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삶의 이치까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동호회 가입 초기에 참석해서 걷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고,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차서 힘들어했다. 지금도 몸이 힘들 때의 신체 반응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힘들다고 인식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단지 다리는 아프고, 숨은 거칠어질 뿐이다.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나 적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자신과 세상은 무궁하다. 작고 좁은 자신만의 인식 세계를 확장해서 좀 더 큰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 성장이고, 그런 성장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 인식의 확장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게 되면서 타인을 좀 더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해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만든다. 그런 경계 안에서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경계 속에 갇혀서 고립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도 느끼게 된다. 그런 위기를 통해 자신의 성을 부수고 넓은 세상으로 나와 타인과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수반된다. 성장을 위한 성장통이다. 이 성장통을 잘 견뎌내면 ‘나’와 ‘너’의 경계가 아닌 ‘우리’라는 우리 속에서 함께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걷기는 바로 이런 점에서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성장의 장(場)이다.     


“걷기란 생활의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고 행동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중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주는 행동이다. 우리는 시계추 같은 반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현 상황은 시계추의 진자 운동 반경 어디쯤엔가 있다. 오른쪽과 왼쪽을 반복하고, 내려왔다 올라갔다 반복할 것이다. 이런 반복된 일상이 삶이라는 것을 알고 균형을 잡아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걷기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며 마치 수행자나 철학자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 추, 인식의 확장, 단지 신체의 반응일 뿐, 마음의 뜰을 걷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기 위한 도전, 너와 나의 경계 허물기 등 진리의 세계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리의 세계를 보고 확인하고 체득하기 위해 수많은 종교인이나 철학자들이 수행하며 공부하고 있다. 삶의 진리를 이렇게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이미 진리를 체득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잘 아는 사람은 알기 쉽게 표현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와 맥주, 치킨을 먹고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갔다. 복지 시설에 근무하는 그녀는 복지 서비스의 일환으로 도시락, 심리치료,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등이 제공되고 있지만, 걷기 프로그램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어려움의 이유도 다양하겠지만, 그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더욱 지치게 된다. 지친 감정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걷기라고 그녀는 누누이 강조했다.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일단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심신 건강 회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고, 그런 환경이 조성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녀가 걷기와 동호회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점점 더 확장시켜서 온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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