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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May 12. 2024

걷기란 호흡이다 (나들이)

걷기란?

걷는다는 것은 곧 시간과 동행하는 것, 아이와 함께하듯 시간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이다. 그러면 잊혔던 기억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다시 떠오르고, 우리는 황혼 녘의 그 오랜 산책에서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하듯 이 기억들과 인사를 나눈다. 결국 우리는 이 기억들에 관용을 베푼다. 기억 역시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는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되살리지도 않고, 후회 때문에 영혼을 지치게 만들지도 않음으로써 말이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여름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 처음 참석한 날이었다. 길 안내를 맡은 그를 따라 안국역에서 삼청공원을 걸었다. 서울 구석구석 골목길을 마치 손금 보듯 거침없이 걸으며 길 안내하는 모습이 신기했고, 서울에 그렇게 걸을 만한 길이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동호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그의 길을 따라 걷고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건축사로 60대 중반인 지금도 건설 공사 현장에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밴 직업상 특성 때문인지 사소한 실수나 오차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일산역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9시 47분에 도착한다는 카톡을 보내왔고, 역사 내에 위치한 커피숍 사진을 보내주며 정확한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언제 어느 곳을 가든 반드시 사진과 기록을 남기는 것이 습관화된 그가 예전에 찍어서 보관한 커피숍 사진을 보내 주었을 것이다. 그날은 그가 오후 12시 30분부터 고봉산, 탄현 공원, 황룡산, 운정 호수 공원을 안내하는 날이어서 사전에 만나 인터뷰를 한 후같이 걷기로 했다. 지방에서 공사 중인 프로젝트의 현장소장으로 근무하므로 주말에만 서울에 올라오기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기가 쉽지 않아 걷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2010년에 아내의 간곡한 권유로 우연히 삼성 제일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걷기 시작했다. 그 당시 최고혈압이 270으로 높게 나와서 다른 검진을 진행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3일간 입원하여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도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작 그는 혈압이 그렇게 높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가족을 위해서라도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힘들어서 친구들에게 민폐가 된다는 생각에 등산을 그만두고 걷기 동호회에 가입해서 걷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중도포기를 모르는 성격을 지닌 그는 독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걸으며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많은 길을 걸은 그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길을 알고 있고 잘 걸을 수 있는 걷기의 달인이 되었다. 함께 등산 다녔던 교회 친구들도 요즘은 가끔 그와 함께 등산을 가면 오히려 힘들어서 먼저 쉬자고 얘기를 하며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고 있다.            


그는 건축사 사무실을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었다. 직원을 10여 명 둘 정도로 일이 바빴고 건강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상태였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는 회사 업무의 대부분을 홀로 책임지고 수행할 수밖에 없다. 조직을 제대로 갖추기에는 회사 규모가 그만큼 크지 않고, 또 능력 있는 직원을 고용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 대표로 프로젝트 계약 수주를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수주한 공사를 감독하고 진행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내부 관리는 어쩔 수 없이 소홀할 수밖에 없다. 내부 직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상황으로 인해 결국 직원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척들을 위해 보증해 준 것이 문제 되어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적 손실도 괴로웠지만,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분노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에 대한 분노가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능력과 사회적 관계의 미숙함으로 인해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잘 운영하여 가족과 직원들과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해 성공을 꿈꾸며 열심히 일 한 죄 밖에 없는 그에게 사람들이 안겨준 상처는 너무나 크고 깊었다. 그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를 고통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는 걷기를 선택했고 미친 듯이 걸었다.        


동호회에서는 모든 회원들에게 본명 대신 별칭 사용을 권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 나이, 성별, 경력 등과 관계없이 길 위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원칙하에 서로에게 000님이라고 부른다. 또한 본명, 직업, 나이, 결혼 여부, 기타 개인적인 질문은 일절 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존중하며 걷고 있다. 그는 네이버 걷기 동호회 ‘걷기 마당’에서 ‘나들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좋아하는 그는 그 시를 읽으며 인생은 나들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들이’로 정했다고 한다. ‘귀천’을 찾아보았다. 인생을 ‘소풍’으로 비유하고, 잠시 다녀가는 소풍 같은 삶에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무욕의 삶을 살고 싶다는 삶의 태도를 담백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삶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이 살고 싶은 그에게 이 시가 마음의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 천상병)     

                                                                                                                                            걷기 시작한 후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아침에 기상하면 몸이 개운하고 상쾌해졌다. 잡생각도 덜 하게 되고 생각도 정리되면서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홀로 또 함께 걸으며 과거의 상처들과 괴로운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 스스로 들볶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고 마음도 편해지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해도 ‘그러려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남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양보하고,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마음의 여유와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홀로 걸으며 길을 찾아 나섰고, 찾은 길을 동호회 회원들에게 안내하며 함께 걷고 있다. 그에게 걷기는 치유이자 동시에 새로운 도전이고, 삶의 의미가 되었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길을 걸은 그의 걷기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다.

       

“서울 둘레길, 한강변 걷기, 그 외에 많은 길을 찾아 홀로 걷거나 함께 걸었다. 2017년 말부터 걷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총 750km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하여 2019년 5월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19년 6월부터 남파랑길을 걷기 시작해서 아직 진행 중이다. 남파랑길은 부산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 땅 끝 마을까지 이어지는 1,463km에 달하는 남해 둘레길로 2020년 12월에 마칠 계획이다. 2021년 1월부터 서해안길 1,804km를 준비하고 있고, 그 이후에는 DMZ 평화누리길을 걸을 계획이다. 2023년 하반기 경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한반도 삼면에 조성된 해안 도로와 DMZ 평화누리길을 잇는 4,500km에 달하는 코리아 둘레길을 정부에서 조성 중이다. 아마 그가 이 길을 모두 걸은 첫 번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리아 둘레길을 모두 마친 후에도 그의 걷기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국내 좋은 길이 너무나 많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내륙에 조성된 길과 앞으로 조성될 길을 평생 찾아다니며 걸을 계획이라고 한다.       

    

“해외 유명 트레킹 코스가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길을 걸을 생각은 아직 안 하고 있다. 국내에 좋은 길이 너무나 많다. 지리산 둘레길도 있고, 소백산 둘레길도 있고, 앞으로도 이런 길은 계속해서 조성될 것이다. 그 길을 계속해서 걷고 싶다. 국내에 조성된 길만 평생 다녀도 모두 걸을 수 없을 것이다. 국내의 모든 길을 구석구석 걷고 싶다.”       


그는 길을 편애하지 않고 어느 길이나 모두 좋아한다. 같은 길도 걸을 때마다, 계절마다, 또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되기도 한다. 길을 가리지 않고 어떤 길도 좋아하고 있는 그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걸었던 해파랑 길이 특히 인상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그는 바닷길을 걸으며 끊임없이 올라오는 잡념을 시원한 바닷바람에 날려버렸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상처의 찌꺼기를 바다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분노에 찬 마음을 바위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로 식혔을 것이다. 걷기를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 가면서 그는 카페의 길 안내자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카페 매니저로서 1년간 봉사하기도 했다.    

        

“걷기 동호회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받았고, 그 고마움을 환원하고 싶어서 길 안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회원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한다. 카페 매니저로 활동하고 또 길 안내하며 회원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백인백색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카페의 취지와 어긋난 언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마다 운영진의 일원으로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다 보니 가끔은 오해나 비난을 받기도 한다. 카페에 대한 열정이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카페나 운영진에 대해 공격하거나 불만을 얘기하면 마치 내가 공격이나 비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 스스로 가끔은 왜 그런 감정과 생각이 올라오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동호회 활동을 같이 하며 그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고, 그의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갖고 있는 걷기와 카페에 대한 열정이 어느 누구보다도 깊고 크다는 것이다. 가끔은 그의 강한 어조가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고, 의견차로 인해 불편한 관계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걷고 얘기를 나누며 서로 이해하고 좋은 길동무로 같이 성장해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적대시하거나 비난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런 실수와 어리석음을 통해서 생각과 감정은 그 사람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 그 사람 자체는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 성찰도 한다. 우리는 걸으며 단순히 신적인 건강을 얻는 것이 아니다. 자연 속을 걷고, 길동무들과 얘기하고, 웃고, 다투면서 자신이 쌓아온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그는 아는 길을 편하게 걷는 것이 사람이 아니다.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길을 탐구하고, 찾아 헤매기도 하면서 길을 몸으로 익혀나가고, 머리로 기억하고,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 교통편과 숙소를 알아보고, 길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해서 길동무들과 함께 공유하고 걸으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에게 과연 걷기란 무엇일까? 왜 그렇게 많이 걷고, 길을 찾기 위해 애쓸까? 걸으면서 또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보며 히딩크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I’m still hungry!!” 그렇다!! 그는 늘 길이 고프다. 아무리 걸어도 길에 대한 허기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는 길을 걸으며 동시에 길이 고픈 사람이다.         


“걷기란 호흡이다. 한 호흡 들이마시고 내쉬지 않으면 죽게 된다. 내게 걷기란 바로 생명, 생존과 같은 호흡이다. 호흡 못하면 죽듯이 걷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에게 걷기란 바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삶의 활력이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며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감정의 분출구다.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어린 가장으로 많은 일을 겪고 견디며 힘들게 살아온 그는 매 순간을 마치 외줄 타는 느낌으로 살아왔다.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사소한 실수라도 하게 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힘들게 버텨내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걷기다.         


걷기를 통해 생존의 방편이 삶의 활력으로,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 화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역지사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키우며, 자신의 벽을 허물고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 생각, 소속된 조직이 하나라는 동일시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상처에서 생살이 돋아나서 웬만한 상처 정도는 쉽게 치유하고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얘기하지만, 그간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걷기 동호회에서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걷기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살아갈 것이고, 길 위에서 대미를 장식한다는 염원을 지니고 있다. 꾸준히 테마 별 길을 탐구하고, 걷기 마당에 적합한 걷기 루트를 개발하고, 길 위에 녹아있는 역사적 의미를 공부하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공유할 것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풍 가듯 가볍고 즐겁게 길을 걸으며 삶을 나들이하듯 살고 싶다고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을 떠나기 위해서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워야 호흡을 편안하게 쉴 수 있다. 조급하거나 불안하면 호흡을 편하게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 우리는 자연 속을 걸으며 편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 자연은 절대로 조급하거나 욕심내지 않고 순리대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그런 자연의 모습을 보고 배우고 성찰하며 경쾌한 걸음으로 나들이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삶이다. 길을 찾고 걷는 그의 모습을 보면 ‘고산자 김정호’가 생각난다. ‘걷기의 달인’이자 현대판 ‘고산자’인 ‘나들이’는 소풍 가듯 길을 걸으며 자신을 비워내는 나들이를 하고 싶어 한다. 과거의 모든 상처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비우며 가볍게 운수납자처럼 살아가는 ‘나들이’가 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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