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사라진 아이돌 中

수록시: <빈집>, 기형도

일주일 후, 안토니 씨에게 연락이 왔다. 상기된 목소리로 시작된 말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정리하자면 자신이 어떻게 이즈를 설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시 추리에 대한 선생님의 능력과 인지도를 강조한 후, 선생님을 만나면 그녀 자신도 모르는 진심을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과 달리 이즈가 의외로 쉽게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덧붙였다.


다음 날, 사무소의 초인종이 울렸다. 문 앞에는 놀랍게도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ANZ의 리더, 이즈가 서 있었다. 무대 위와 달리 수수한 복장이었지만 멀리 주방에서도 그녀가 연예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큼 출중한 미모였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 아이돌 특유의 생기 있어 보이는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연예인들은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와 꺼져 있을 때 모습이 다르다 들었는데, 안토니 씨의 말대로 그녀는 무척 밝은 사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즈 양.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미인이시군요.”

“감사해요. 설 탐정님. 사무소가 참 멋지네요. 엔틱하고 아늑한 느낌. 저도 이렇게 꾸미고 살고 싶을 정도에요.”

“아, 저 친구와 비슷한 취향이시군요. 사무소를 꾸미는 건 통 재주가 없어서 제자에게 맡기는 편이지요. 자, 일단 앉으시죠.”

“아, 저분이 제자시군요. 참, 대표님께 제 본명을 들으셨다면서요? 그럼 편하게 민아라고 불러주세요.”


인사를 마친 이즈, 아니 민아 씨는 차를 준비하는 내 쪽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화답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볼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연예인을 실물로 본 건 처음이다.)


“안토니 씨께 듣자하니 기형도 시인을 좋아하신다고.”

“네, 맞아요. 탐정님은 어떠세요?”


기형도 이야기를 꺼내자 민아 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다가도 기형도 얘기만 나오면 깬다는 안토니 씨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닌 듯했다.


“물론입니다. 민아 양. 어두운 시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탁월한 그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시 시 탐정님이시라 표현이 다르시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기형도 시인의 어떤 시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빈집」이라는 시를 좋아해요. 뭔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런데 사실 잘 모르겠어요. 왜 그 시에 끌리는지. 시 추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으니까요. ‘그저 느낌이 좋아서’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 거 같아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민아 씨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대표님이 탐정님을 만나보라고 하셨지만 선뜻 나서기를 망설였어요. 제 마음을 들킬까봐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문득 탐정님께 들킬 걸 두려워할 만큼 잘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 마음을 말이죠. 어쩌면 탐정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를 거 같아서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빈집을 통해서 민아 씨 마음을 알고 싶다는 거군요.”

“맞아요. 탐정님.”

“사실 그게 안토니 씨의 의뢰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네, 들었어요. 대표님이 요즘 제가 좀 변한 거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근데 사실 저도 그걸 알고 있어요. 제가 변했다는 걸. 그런데 저도 왜 그런지 모르니 왜 그렇게 변한 거냐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더라구요. 음…제가 대표님이라도 답답하실 거 같아요.”

“그렇군요……. 자, 완승 군.”


선생님은 커피를 내놓고 옆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 말했다.


“이 친구는 제 제자이자 조수인 성완승 군입니다. 시 읽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 커피 맛처럼 말이죠. 어떤가? 낭독을 부탁하려 하는데 말야.”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게다가 시를 낭독하는 건 내 담당이기도 했고.


“네, 커피가 참 맛있어요. 낭송도 기대할게요. 완승 씨”


민아 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잘 읽을 수 있을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빈집>


“정말 좋네요. 이렇게 빈집을 낭송으로 들은 적은 없었는데, 시어가 살아 숨쉬는 것 같아요.”

“그게 이 친구 능력입니다.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나은 데 민아 씨 앞이라 긴장을 했나 봅니다.”


긴장을 했다는 선생님의 분석은 정확했다. 솔직히 말해 내 생애 이렇게 떨리는 낭송은 처음이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바로 옆에 최고의 아이돌이 앉아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민아 씨 같은 미인 앞이라면 누구나 긴장을 하기 마련이죠. 그럼 시를 한 번 보실까요?”


민아 씨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연입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자신의 입장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지요. 사랑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남기고 있지요.”

“네, 저도 그렇게 보이네요.”

“시인은 2연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숨기고 있지요.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에서는 조금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완승 군, 자네도 연애를 해본 적이 있겠지?”


갑자기 나에 쏠린 민아 씨의 시선에 순간적으로 경험이 많다고 해야할 지, 없다고 해야할 지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별 다른 뜻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일 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네, 있습니다. 선생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군. 이왕 생각한 김에 좀더 생각해보게. 짧은 밤은 무얼 상징할지.”

“아무래도 그녀와 함께 있었던 밤이겠죠? 사랑에 빠져 있을 때에는 함께 있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니까요.”


나는 민아 씨를 의식해 ‘그녀와 함께 있었던 밤’을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다행히도(‘당연하게도’라고 해야 한다는 것 나도 잘 안다.) 민아 씨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짧았던 밤’은 사랑에 빠졌을 때라고 해독할 수 있겠지.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에서는 뭐가 느껴지나?”

“음...좀 더 상상을 해봐야겠군요. 둘은 한 공간에 있었고 창밖에는 겨울 안개가 보였죠.”

“좋은 시도네, 완승 군.”

“완승 씨도 탐정님 못지 않네요.”

“그렇습니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훌륭한 제자이지요.”


조금씩 민아 씨에게 적응되기 시작했는지 선생님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수룩하지만 훌륭하다라...칭찬이겠지? 


“계속할까요?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에서 드러나는 대상은 ‘촛불’입니다. 아까 완승 군이 그려줬던 공간으로 들어가보면, 그곳에는 창이 있고 두 사람이 있고 그 사이에 촛불이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이 말이지요.”


민아 씨는 선생님의 말을 따라 상상을 하는 듯이 천장을 바라보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문제는 2연의 4행입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이게 뭘까요? 지금까지는 우리의 상상은 사랑을 하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갑자기 ‘공포’라니, 이 상황에서 나타날 공포는 뭐가 있을까요?”

“이별....아닐까요?”


민아 씨가 대답했다.


“이별, 좋은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완승 군. ‘흰 종이’는 뭘까?”


‘흰 종이’. 민아 씨 말대로 공포를 이별이라고 한다면 흰 종이는 이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흰’ 종이인가. 흰색에 대해 생각해보자. 흰색은 보통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는 깨끗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종이’는 무언가를 쓸 수 있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종이에는 이별을 쓸 수 있겠지. 응? 이별을 쓴다고? 이별을 쓸까봐 무서운 건가? 그래서 3행에서 ‘잘 있거라’라고 말했다면?


“선생님!”

“말해보게, 완승 군.”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은 공포입니다. 그러니 공포를 기다린다는 건, 이별을 할까봐 무서워하는 화자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화자는 그런 공포심과 작별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작별이라고요?”

“네, 민아 씨. 4행에 ‘잘 있거라’가 있기도 하고, 7행에 한 번 더 반복되기도 하기 때문이죠. 쉽게 말하면 ‘이별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여, 잘 있거라.’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완승 씨. 왜 이별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기다린다’라고 했을까요?”


말문이 막혔다. 이별에 대한 공포를 기다린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흰 종이’ 결국에는 ‘흰 종이’에 대한 단서가 없다. 내 해독대로라면 흰 종이는 적히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이별에 대한 공포가 적히는 것’과 작별하는 것이다. 자, 생각해보자.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있다. 만약 그녀가 화자와 이별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치자. 그리고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아니지, 흰 종이니까 아마 편지를 쓰겠지? 그렇지, 이거다.


“흰 종이는 편지입니다. 이별 편지.”

“네? 갑자기 무슨 편지요? 지금까지는 둘 사이가 좋았는 걸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계시던 선생님의 왼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감을 느꼈다. 내 추측이 맞았다!


“다만, 아직 적히지 않았습니다. 헤어지자는 얘기는요. 하지만 화자는 미리 두려워하고 있지요. 그녀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는 걸 말이죠.”

“훌륭하네, 완승 군. 역시 탐정은 경험이 만드는군.”


선생님, 감사합니다만 제가 그렇게 경험이 많지는 않습니다. 


“민아 양. 지금 연애를 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시간이 없어요, 탐정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소 놀랄 법도 했지만 당황스러운 기색 없이 농담조로 말했다. 하긴 연예인이라면 언제든지 기습적으로 받을 수 있는 질문이니 미리 대비도 철저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과 사랑 사이 연관관계는 없다는 연구결과가 있더군요.”

“그런 연구를 하는 데도 있나요? 놀랍네요. 하긴 공감이에요. 막 데뷔했을 때는 그렇게 통제된 환경에서도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까.”


신인이었던 이즈가 연애를 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특종기사감인 사실을 스스럼 없이 말해준 것은(사실 너무 궁금해서 대상이 누군지 물어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민아 씨가 어느 정도 우리에게 경계심을 풀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최근 몇 년 동안 너무 여유없는 생활을 했어요. 거기에 연애라는 짐까지 얹을 수 없었죠. 연애라는 게 할 때는 좋아도 헤어지면 후유증이 오래가잖아요? 특히 저 같은 직업은 그 후유증이 더 오래 가요.”

“그겁니다. 민아 씨. 연애를 하면 항상 따라오는 것.”

“네? 혹시 후유증인가요?”

“일종의 후유증이죠. 결별.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 아픔 같은 것들이죠.”

“죄송한데 좀 쉽게 설명해주시겠어요? 제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탐정님과 얘기하다보니 제가 지금까지 제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에요.”

“하하. 죄송합니다. 정리하자면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과 이별하겠다는 것은 상대보다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아까 완승 군이 밝혀냈듯이, ‘흰 종이’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지요. 흰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건 화자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화자는 비록 상대가 아직 이별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별을 통보하는 종이가 자신에게 전달될 것을 예감했겠지요. 그래서 자신이 먼저 이별한 겁니다.”

“겁쟁이네요....화자는. 아직 오지도 않은 이별이 두려워서 먼저 이별을 하다니요.”

“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상대방과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니까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이별의 낌새를 느꼈다고 봐야합니다. 당사자만 느끼는 미묘한 기류같은 거지요. 연애경험이 있으시다니 어떤 느낌인지 아실 겁니다.”

“네, 감이 오네요.”


너무 솔직한 대답에 본인도 놀랐는지 민아 씨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졌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를 보시죠. 이 시구는 화자 본인도 사실 이별을 예전부터 이별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지요.”

“아, 그 구절이 그렇게 해독이 되는 거군요.”

“그렇다면, 선생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는...”

“계속 해 보게.”

“연인과 인연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 함께 하고 싶은 열망을 접어야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군요.”

“그렇다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 게,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쉽진 않겠지. 그 증거는 3연이네.”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 그런 마음을 드러낸 거라구요, 탐정님?”

“네, 민아 양. 먼저 9행을 보시면 빈집이 있지요. 사랑을 가두는 공간입니다. ‘갇혔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화자가 가둔 거지요. 하지만 더듬거립니다. 민아 양은 사람이 언제 더듬거린다고 생각하시죠?”

“아마도 눈이 안 보일 때가 아닐까요?”

“그렇죠. 사람은 시야를 잃었을 경우 더듬거리는 행위를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왜 화자가 갑자기 시야를 잃었는가?’입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지요. 앞의 내용이 그 증거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민아 씨가 대답했다.


“독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겠죠? 눈 딱 감고 문을 닫은 거겠죠.”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아 씨 또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커피 한 잔 더 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내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동안 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숨을 크게 내쉰 후 드디어 입을 열었다.


- 下에서 계속


이전 04화 사라진 아이돌 上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