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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사라진 아이돌 下

수록시: <빈집>, 기형도

“연애가 아니에요, 탐정님.”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전을 떠올리셨나보죠? 혹시...”


그녀의 큰 눈이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던 때였나요?”


그녀는 흠짓 놀란 표정을 짓고는 김이 빠졌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탐정님은 못 속이겠네요. 세간에 ‘설록 앞에서 시를 펼치지 마라. 네 영혼까지 훑어볼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아세요?”

“처음 듣습니다만.”


거짓말이다. 그런 말은 단골 커피점 사장님한테서도 충분히 들었던 이야기다. 분명 안토니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탐정님도 거짓말에는 서투시네요.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방금 사람들이 제가 시로 상대의 영혼을 볼 수 있다고 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농담조로 건넨 선생님의 말에 민아 씨는 살짝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커피가 정말 좋네요. 감사해요, 완승 씨”


나는 고개를 까딱하며 답례를 했다. 


“제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음악이었죠. 지금 하고 있는 음악은 아니구요. ANZ로 데뷔하기 전에 하던 음악이었죠.”

“데뷔하기 전에는 주로 어떤 음악을 하셨지요?”

“재즈였어요. 특히 보사노바를 좋아했어요. 어렸을 적 상파울루에서 살았었거든요. 10년 정도. 아빠가 브라질로 발령이 나시는 바람에 가족 모두 이민을 갔어요. 말로 안 통하는 외지에서 외로웠어요. 그때 저를 위로해준 게 기형도와 보사노바였어요. 브라질 사람들은 재즈를 좋아해요. 유명한 뮤지션도 많구요.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쪽으로 관심이 많았어요. 혼자 노래와 악기를 연습한 후에 버스킹을 했어요. 그곳에는 재즈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동양 여자애가 보사노바를 연주하는 게 신기했나 봐요. 나름 동네 인기 스타였죠.”


민아 씨는 ‘인기 스타’를 말하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에 귀국했어요. 아빠 일이 마무리됐거든요. 한국에 왔지만 음악은 계속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브라질에서 하던 것처럼 기타를 매고 홍대 앞에서 가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안토니 대표님을 만난 거구요.”

“한국에서는 비주류 음악이죠. 재즈도, 보사노바도.”

“네, 그래도 좋아해주는 분들이 있긴 했어요. 몇 분이지만 공연 때마다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대표님도 그 중 한 분이셨죠. 돈은 못 벌었지만, 사실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아니기도 했지만요. 재밌었어요. 아니, 행복했달까? 내가 하고 싶은 음악,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안토니 씨의 캐스팅 제의를 받으신 거군요.”

“네, 사실 알고 있었어요. 이 음악을 계속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걸 말이죠. 선생님 말씀처럼 비주류 음악이잖아요. 언제까지고 길거리에서 공연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근데 그때 마침 대표님이 캐스팅 제의를 하시는 거예요. 고민을 했죠. 아주 오래. 울기도 많이 울었고.”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이군요.”

“정말 그러네요. 사실 꿈이 있긴 했거든요. 엘리안느 엘리아스(Eliane Elias)같은 싱어송 재즈 보컬리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눈 딱 감고 외면했던 거 같아요.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 거죠, 기형도 식으로 말하면. 생각해보면 겁쟁이였죠. 그래도 그때는 기왕 선택한 것 열심히 해보자고 죽기 살기로 했어요. 춤도 곧잘 췄거든요. 브라질이잖아요?”


살짝 웃는 민아 씨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삼바 춤을 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도 나름 어울릴 것 같았다.


“사실 활동을 준비하는 기간에도, 활동을 하는 기간에도 재밌었어요. 보사노바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좋은 멤버가 영입이 되기도 했고, 안토니 대표님이 동분서주한 덕도 있겠죠. 모두들 한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열정이 꺼진 겁니까?”

“음...미국 활동 때였어요. 숙소가 센트럴 파크 주변이어서 멤버들이랑 같이 공원을 걸었어요. 해질 즈음이었는데 거기는 마침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오랜만에 신나게 수다를 떨었어요. 커피도 마시고. 그런데 마침 그때가 ‘서머 스테이지’가 열리는 날이더라구요. 야외 공연하기 참 좋은 날씨이기도 했죠. 근데 거기서 보사노사를 연주하는 내 또래 여가수를 봤어요. 신인이었는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요. 근데 그 노래를 한참동안 멍하니 들었던 거 같아요. 멤버들이 숙소로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아마도.”


우리는 숨죽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걸 놔두고 다른 길로 도망쳐 온 거잖아요. 흰 종이가 주는 공포를 제가 못 이겨서 빈집에 넣고 문을 잠가 버린 거죠. 그런데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녀는 너무 행복해보였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걸 보니, 좀 시시해졌어요. 제가 하는 일, 노래, 춤이 모두다.”

“그렇군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왜 변했는지. 탐정님께서 시 추리를 듣기 전까지는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나니까 모든 게 정리가 되네요. 5년 전에 저는 보사노바로 유명해질 거라는 꿈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어요. ‘내 것이 아닌 열망’인 줄만 알았던 거죠.”


민아 씨는 손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이제 좀 후련하네요. 왜 내가 슬럼프에 빠졌었는지 알았어요. 제가 뭘 원하는지도요.”

“그럼 이제 우리는 ANZ를 볼 수 없는 건가요?”


나는 잃어버린 예전의 꿈을 상기해낸 그녀가 더 이상 ANZ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뇨. 두 번씩이나 도망칠 수는 없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표정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부드러웠으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계속 할 겁니다. 지금 그만두게 되면 저는 또 ‘더듬거리며 문을 잠’가야 해요. 멤버들도 있고, 대표님과의 관계도 있구요. 더군다가 저희를 기다리는 팬들도 있어요. 게다가 사실 재미있기도 해요. 팬들이 우리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따라 추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요. 유튜브에 커버링한 춤과 노래가 올라오는 걸 보는 재미도 있구요. 다시 열심히 할 거예요. 다만……”

“다만?”

“언젠가는 보사노바도 해보고 싶어요. 5년 쯤 활동했으니 솔로 앨범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죠. 대표님을 설득해서 솔로 앨범만큼은 보사노바로 채워보고 싶어요. 상업적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태보죠. 민아 씨와의 대화를 들려준다면 안토니 씨도 납득할 겁니다. 게다가 민아 양이 부르는 보사노바를 꼭 들어보고 싶기도 하구요.”

“발매가 되면 한동안 사무소에는 민아 씨 노래만 들리게 되겠네요. 선생님이 후앙 질베르토 팬이시거든요.”

“아, 탐정님도 보사노바를 좋아하시는군요?”


민아 씨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앨범이 발매되면 사무소에서 라이브로 불러 드릴게요.”

“그러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군요. 민아 양.”

“진심이에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모르고 있었던 제 자신을 찾은 느낌이거든요. 두 분 덕분에.” 


그녀의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대화를 마친 후, 그녀는 거듭 감사를 표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보사노바의 리듬을 입은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배웅을 마친 선생님이 오디오 쪽으로 걸어갔다. CD를 찾고 계신 것 같았다.


“오늘은 이 노래가 어울리겠군.”


‘The Girl From Ipanema’가 흘러나왔다. 사무소가 보사노사의 리듬으로 가득 메워졌다. 방금 사무소를 나간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의미도 모르는 포르투갈어 가사를 들리는 대로 따라 불렀다.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지붕 덮인 테라스에서 민아 씨, 아니 이즈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면 무척 근사한 여름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사라진 아이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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