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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연 Jul 30. 2024

행방불명의 시간을 찾아서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니 수영장으로, 바다로 원 없이 나가 놀 거라던 다짐이 무색하게 타는듯한 날씨에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에먼 에어컨만 껐다 켰다 하고 있다. 덩달아 큰아이에게서부터 시작된 감기가 나에게로 까지 넘어와 찢어질듯한 목구멍과 천근만근 사지를 겨우 끌고 숙소 청소를 다녀와야만 했다. 겨울방학은 춥고 길어서 싫다 뇌까렸는데 여름방학은 덥고 휴가철이라 일이 많아 싫다 생각하는 나는 참으로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냥 방학이 싫은 거라 말해’

맞다, 나는 방학이라는 두 단어에 진즉부터 거부감을 가지고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잉여시간을 오롯이 나 자신에게 쓰지 못하고 아이들과 나눠야 한다는 점이 부담이 된다. 먹고 싶지 않은 아침 식사를 굳이 차려야 하고, 요가 수업을 가지 못 하며, 여유 있게 모닝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나가지 못한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경매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책을 여유롭게 읽을 시간도 없다. 루틴처럼 사용하던 아침시간을 송두리째 침범당하고 만 것이 못 마땅해 입이 삐죽 나와버리고 말았다.아이들 아침밥을 먹이고 방학숙제와 몇 가지 문제집을 함께 봐주고 나니 어느새 숙소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머털도사’라는 만화영화의 장면중,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후~하고 불면 여러 명의 복제 머털도사가 나타나 이일저일 해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머리카락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가닥만 뽑아 내 분신들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1번, 너는 밥과 청소, 빨래와 같은 집안일을 해. 아! 오늘 분리수거 날이야 쓰레기도 좀 버리고 오고’

‘2번, 너는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서 놀아줘. 다녀와서 샤워까지 시키는 것도 네 몫이야 1번에게 미루지 말고!’

‘3번, 숙소로 가서 청소랑 입실 준비를 마쳐놔’

‘4번, 넌 밀린 공부를 좀 하고 있어. 동영상 강의도 돈 주고 구매한 거라 놓치지 말고 시청해야 한다.‘


이런 실없는 상상들이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나라는 존재는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잘게 조각내어 붙여본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해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기세등등하던 태양의 빛도 부드러워진 오후 5시. 종일 집안에서 종종거리던 아이들이 축구를 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감기기운에 누워서 쉬어볼까 하다 불현듯 고수리작가의 책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에게는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하다. 30분도 좋고1시간도 좋다.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커피를 마시든 책을 읽든 그림을 그리든 텔레비전을 보든. 어떤 책임으로 불리는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행방불명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자책감이나 미안함을 갖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 24시간 중에 30분 정도는 오로지 나로 살아도 괜찮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고수리, 마음 쓰는 밤 중‘


나는 아이들에게 부여받은 잠시간의 시간을 오롯이 나로 살 수 있는 브런치 공간에 위탁하기로 한다. 짧게나마 오늘의 생각을 정리하고, 내 마음을 글로 들여다본다. 아찔하게도 오늘이 방학 1일 차이다. 아이들이 나에게 이런 행방불명의 시간을 매일 허락해 주길 간절히 바라야겠다. 부탁한다,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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