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칠레워킹홀리데이
“대책 없다:
어떤 일에 대처할 계획이나 수단이 없다.”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채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던 나의 모습을 보면 딱 ‘대책 없다’로 정의할 수 있다. 칠레 워킹홀리데이는 찾아봐야 정보도 없고, ‘고생 엄청 하고 부딪혀보자!’라는 마음가짐 때문에 처음으로, 계획도 없이 최소한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던 나는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기내식과 함께 맥주를 시킨 후 태평하게 잠에 들었다. 이런 나의 ‘대책 없음’ 덕분에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환승 공항인 마드리드에 도착하고 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마드리드 공항은 인천공항의 T1, T2 터미널처럼 노선마다 터미널이 떨어져 있었고 나는 환승하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고 다른 터미널로 가야 했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몰랐던 나는 환승 공항까지 안내 표시로 눈치껏 가다가 길을 잃었다. 안내해주시는 분께 여쭤봐도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없었고, 순간 국제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칠레로 교환학생을 가시는 한국분이 나타나, 스페인어로 척척 길을 묻고 찾아 나를 칠레행 탑승구까지 인도해 주셨다. (나중에 블로그에서 연락이 닿아 식사를 대접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30시간 만에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한 달 동안 바짝 공부하긴 했지만, 턱없던 나의 스페인어 실력으론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려오기 시작하니 나는 내가 지구 반대편 남미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왔다는 걸 슬슬 체감하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긴장감과 스페인어로 쓰인 글자들 사이로,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 경계선에 있는 워홀러의 어색한 정체성을 뽐내듯이 나는 코트를 입은 체 65L짜리 등산용 배낭을 메고 공항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쩐지 너무 덥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지구 반대편 칠레는 2월에 한 여름이다. 맙소사, 나는 공항에서 여름옷으로 갈아입을 옷을 챙길 준비조차 안 했던 것이다. 한 여름에 코트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게이트를 나와 미리 예약해 놓은 한인 게스트 하우스로 가기 위해 다인용 차량 벤을 예약하러 갔다. 안 써보았던 스페인어를 쓰려니 낯간지럽기도 하고 도무지 입이 안 떨어져서 영어와 바디 랭귀지를 섞어가며 예약을 했다. 어찌어찌 두 번째 난관을 통과하여 게스트 하우스로 향하는 벤에 올라탔다. 공항에서 벗어나 긴 고속도로를 달리는 벤의 맨 뒷자리에 앉아 왼쪽 창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있는 판자촌이 보였다.
“오 공항 주변에 영화 세트장이 있네?”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지했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곳에 생전 처음 보는 판자촌을 보고 사막 한가운데 있는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처럼 영화 세트장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진이 칠레에서 처음으로 찍은 사진이 되었다. 이내 벤이 시내를 통과하면서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들, 분수대에 들어가서 샤워하는 노숙자들, 길거리에 널린 쓰레기들, 건물 벽면의 낙서된 그라피티를 보면서 그것이 영화 세트장이 아닌 진짜 판자촌임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시 사진을 지웠다.)
살면서 평생 본 적 없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벤을 예약하고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나 여기 잘 온 거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