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목적론에 대해서 조금 더 감을 잡아보자. ‘미움 받을 용기’ 책에서는 ‘우리는 화를 못 참아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화를 내고 싶어서 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작가는 ‘감정’ 그 자체는 우리가 쉽게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 그 자체를 버거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 화가 난 엄마가 딸에게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화를 내다가도 엄마는 친구에게 전화가 방금까지의 그 화나던 마음을 곧바로 추스르고 상냥하게 통화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법륜스님은 남편이 죽었다며 밤낮으로 슬퍼하는 여성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슬픔이라는 감정도 별 거 아니다. 이렇게 슬프다가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또 그 순만큼은 남편 생각 안 한다.” 당신이 슬퍼하려고 하니깐 슬픈 거지 원래는 슬픈 게 아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연장과 같은 것이다.
화를 내는 엄마는 딸에게 자신의 주장을 편하고 쉽게(자상하게 설명하기 귀찮아서) 주입하려는 목적이 있고, 남편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는 여성은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일들(남편이 죽고 자식과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들)이 두렵고 귀찮아서 슬퍼하는 것일 수 있다.
아들러가 말하는 목적들은 대체로 불순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있다. 그래서 자꾸 별 힘도 없는 감정 탓을 하며 감정에 지나친 힘을 부여한다. 실제 우리는 부정적 감정이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분은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다닌 과거의 트라우마로 많이 힘들었지만, 결혼을 하고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딱 그렇게 결심하고 트라우마를 놔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트라우마는 사라졌다. 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도 ‘과거는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있지 않는 이상, 현재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태도는 자기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개그맨 김학래씨는 자신의 아내가 ‘쩝쩝’거리면서 밥을 먹는 것을 보고 갑자기 그게 너무 보기 싫고, 아내가 밉게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이 만약 그것 때문에 아내가 싫어지면 앞으로 (계속 같이 살아야하는데) 자신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그 모습을 예쁘고 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실제로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연애를 할 때도 상대방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쉽게 마음을 접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또 상대방의 단점을 귀신같이 잘 찾아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해졌거나, 자신이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남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마주할 용기만 있으면 슈렉 혹은 피오나와도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
누구나 명백하게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집에 가는 길에 큰 교통사고가 나서 그 이후로 차 타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말로는 그 사고 때문에 집 밖에도 못 나가고 힘들다고 하지만 사실은 평소에 취업도 잘 안되고, 삶에 의기소침했었다. 때마침 그런 사고가 (운좋게도) 일어나줘서 그것으로 좀더 나태할 수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 혹은 자기 상황의 납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나 감정을 똑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아프고, 왜 화가 나고, 왜 슬픈가?’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모든 감정들은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감정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이 내게 과연 도움이 될까? 자신의 마음이 분명해지면 삶은 가벼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