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추웠던 겨울.
아빠가 암선고를 받은 지 세 달 만에 화려하고 우아한 언니는 들어본 적도 없는 비인두암 4기의 암환자가 되었다.
아빠가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사투를 벌일동안 언니는 다른 병원에서 온갖 검사와 치료계획을 세워야 했기에 해외 출장을 갔다고 둘러댄 언니 곁을 그날부터 내가 함께해야 했다.
그렇게 4년 반.
나는 언니와 동행했고
나의 자유와 언니의 회복을 맞바꾸려 끝까지 고군 분투했다.
아끼고 의지했던 첫째 딸의 소식도 모른 채 언니를 찾던 아빠의 허망한 눈빛과 꺼져가던 희망은 엄마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기적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회복된 아빠를 마음껏 축하해드리지도 못한 채, 언니와 나는 남들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메이저병원을 쇼핑하듯 휘젓고 다녔고 그 노고에 못 미치게 어느 교수님에게도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결국 치료사례가 많은 중국에서 중입자라는 생소한 치료를 받기 위해 언니와 나는 비행기를 탔고, 오롯이 서로에게만 의지한 채로 한국에선 거의 불가능한 호화로운 암환자의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온 예쁜 배우로 부풀려진 나의 언니는
머리에는 구루푸를 말고 얼굴에서는 고급스러운 광을 뿜어내며 독하다는 항암제를 투약받았다.
그동안 잘 숨겨놓던 까칠한 성깔머리는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잘못 꽂을 때마다 고스란히 튀어나왔고, 돌바닥 같았던 소파에 몸을 구겨 잠을 자는 동생에게 신경 쓸 겨를이 눈곱만큼도 없을 정도로 모든 중심은 오로지 언니 자신에게로만 향해있었다.
아침마다 언니에게 뜨거운 스타벅스 커피를 식지 않게 가져다주어야 했고 갓 구운 빵이 조금이라도 눅눅해져 가져오면 맛이 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언니를 보면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백만 번 마음을 먹으면서도 다음번엔 갓 구운 빵이 눅눅해지지 않고 언니 입에 배달되게 더 빨리 뛰어왔다.
마치,
영화세트장에 언니와 나만 뚝 떨어진 것 같았던
생소하고 시리던 그날의 기억들이 이글의 시작인 이유는 언니가 떠난 지금 나만 홀로 외딴섬에 떨어진듯한 두려움과 같아서이고, 우리가 헤쳐나갔듯 이제는 내가 극복하고 앞으로 내디뎌야 할 걸음의 시작이 닮아서이기도 하다.
언니의 투병생활은 슬펐지만 유쾌했고 둘이었지만 외롭지 않았으며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언니의 견고한 의지와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디그니티는 존경할만했다.
나는 또 다른 공간에서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그녀를
글을 통해 내방식으로 간직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