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어주는 엄마, 싹을 틔워주는 책
어렸을 때, 아마 초등학교를 가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빠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산으로 자주 데리고 가셨다. 좀 더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방학 동안 엄마와 함께 나를 수영장에 보내셨다. 그 당시 수영을 처음 배워서 물에서 호흡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겨울방학 동안 다녔던 터라, 수영을 배우고 샤워실에서 씻고 밖으로 나오면 젖은 머리카락이 얼어서 딱딱해진 것이 재미있어서 손으로 만졌던 기억이 난다. 엄마랑 그렇게 수영장을 다니다 나중에는 혼자 수영을 배우러 다녔었다.
수영장에서 같은 반에 있는 대학생 언니를 따라다닌 덕분에 나는 접영까지 배울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대학생 언니랑 자유롭게 잠수도 하면서 수영장에서 놀았다. 대학생 때는 아빠를 따라 새벽에 국선도에도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아빠는 새벽에 날 깨워서 수영장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특히 새벽에 자고 있는 나를 깨우실 때 나는 가기 싫어서 늘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그때는 걷는 것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부모님께서 가끔 보약 지어주신다고 한의원에 데려가면 운동을 해야 한다는 한의사 선생님께 ‘저는 운동하면 스트레스받아요.’라고 얘기를 할 정도였다. 그때는 움직이는 걸 참으로 싫어했다. 감사하게도 결혼 전에는 부모님께서 틈틈이 운동을 시켜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체력을 유지했다.
결혼하고 1년쯤 되었을 때이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산낙지를 사 왔다. 회식을 하면서 해산물을 좋아하는 내 생각이 났었나 보다. 그러나 그날은 유난히 입맛이 없었다. 그리고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를 위해 산낙지를 사 온 남편의 성의를 생각해 한 번 젓가락을 대는 시늉을 하다 남편에게 소화가 안돼서 도저히 못 먹겠다고 말했다. 회식에서 술을 먹고 온 남편은 금세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잠을 억지로 청했으나 겨우 1시간도 채 못 잤는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배는 점점 더 아파왔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배가 아픈 것을 참다가 친정으로 전화를 했다. 항상 새벽 1~2시에 일어나시는 아빠 생각이 났다.
수화기 너머로 아빠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배가 너무 많이 아프다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너무 많이 참지 말고 119를 부르라고 하셨다. 아빠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안정되어 그런지 조금 괜찮은 것도 같아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새벽 4시가 되어갈 무렵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남편을 깨웠다.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러니 병원에 가자고 말했다. 술이 덜 깬 남편은 비몽사몽간에 나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몇 가지 검사를 받고 맹장염 때문에 배가 그렇게 아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이 터오자 전신마취라를 하고 맹장수술을 받았다. 남들은 ‘맹장수술은 수술하자마자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1주일이 넘도록 어지러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두 번째로 한 수술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을 때다. 아이가 태어난지 100일이 지나면 엄마도, 아이도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고 하는데 나는 좀처럼 기력을 찾지 못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는 나에게 끊임없이 약을 해다 주셨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산후 후유증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아 체력을 돌보지 못했던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정도의 아픔을 겪었다. 몸도, 마음도 함께 아파버린 것이다.
두 돌이 넘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앉아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었을 때였다. 너무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 체력 보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에 약이라면 질색했던 내가 제 발로 한의원을 찾아갔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내 맥을 짚어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소년기까지 체급을 키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어머님은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몸이 티코와 같아요.’
티코는 지금은 단종된 차종인데 1990년대 당시 티코는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로 나와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차이다. 그러나 크기가 작은 탓이었는지 티코를 손으로 툭 쳤더니 손자국이 그대로 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내 몸을 그런 티코와 비교하다니 조금은 속상했다. 그러나 한의사 선생님 말씀을 새겨듣기로 했다. 어른은 자동차처럼 차체 크기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은데 엔진오일 갈 때 되면 엔진오일 갈고, 제때 수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의사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건강한 먹거리를 챙겨 먹고 운동을 조금이라도 하려 노력했다.
나의 티코 자동차 같은 체력은 여지없이 육아를 할 때에도 적용이 되었다. 밤이 되면 아름이에게 언성이 높아지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처음에는 아이가 잘못한 거라 생각했다. 아름이는 숙제를 미리 해놓지 않거나, 음식을 먹고 그대로 두고, 옷을 아무 데나 벗어 두거나 준비물을 미리 챙기지 않고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준비물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름이를 머리로만 이해한다 말하고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숙제하고 놀면 되는데 왜 숙제했다고 거짓말하고 놀까? 어차피 내가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오면 들통 날 거짓말인데 말이다. 나는 아이를 이해할 수없었다.
어느 날, 나는 핸드폰을 새 핸드폰으로 바꾸면서 아이와 내가 통화한 내용이 우연히 저장된 음성 녹음을 듣게 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가 학교 끝나고 친구랑 놀다가 내게 전화하는 걸 깜빡 잊어버렸던 날인가 보다. 아이의 음성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엄마,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며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당시 나는 그런 아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에게 숙제하고 친구랑 노는 거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날 아이는 숙제를 하지 않고 놀아서 내게 혼이 났었다.
물론 학교 숙제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아이도 얼마나 놀고 싶은 마음이 컸더라면 저렇게 마음이 두근두근하면서도 나에게 숙제를 했다고 말했을까?
그래서 어느 날은 아이를 불러 앉혀놓고 말을 했다. ‘엄마가 보니 밤이 되면 엄마가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 네게 화내거나 혼을 낼 때 시간을 보니까 밤 11시가 넘으면 엄마가 그러더라. 그러니 되도록 11시 이전에 할 일을 해놓자. 꼭 엄마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도 밤에 충분히 잘 자야 그다음 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즐겁게 학교도 가고, 친구랑 재미있게 놀 수도 있잖아. 엄마도 피곤해서 기분이 나빠질 것 같으면 네게 말할게. 함께 노력하자.’
물론 말대로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시계를 보면서 나는 감정을 조금씩 조절해나가려고 했다. 숙제를 못한 날은 그날 아이가 자기 전에 할지, 아니면 아침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할지 아름이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선택한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숙제를 못해 학교에 가서 혼나거나 점수를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말을 해주었다. 아이가 당연히 숙제를 해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늘 아이를 쫓아다니면서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해주기 쉽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나는 운동이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운동뿐 아니라 나만을 위한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녁에 퇴근해서 아이와 밥 챙겨 먹고 책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에 따라 음성을 달리 하며 큰 소리로 “네 이놈 ~~~~~~!” 하면서 소리를 높이니 힘들 수밖에.
게다가 책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지식 그림책 조차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읽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어느 날은 책 한 권을 읽어주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워낙 책에 글밥이 많아지는 초등 저학년 시기라 중간에 끊어서 내일 읽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끝까지 읽어 달라고 졸랐다. 책 1권을 그렇게 겨우겨우 읽어주고 책을 덮고 ‘이제 자자.’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 한 번만 더 읽어주세요.’라고 말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초등학교 3, 4학년이 되면서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엄마인 내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전보다 조금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숙제도 하고 공부를 하는 습관이 들자 가끔은 저녁에 밥 먹고 나가 집 앞에서 아이와 함께 줄넘기를 연습하는 여유도 아주 가끔씩 생겼다.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운동하라고 보낸 무용학원에서 배운 스트레칭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저녁에 아이와 책을 읽고, 자기 전에 아이가 스트레칭 동작 시범을 보여주면 따라 해보았다. 아이는 엄마인 내게 직접 여러 가지 동작을 가르쳐 주면서 재미있어했다. 평소에는 엄마한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듣다가 몸이 뻣뻣한 엄마에게 ‘이렇게 해보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렇게요.’라고 말하면서 즐거워했다.
간단하지만 아이에게 배운 스트레칭으로 평상시 피곤한 게 덜 느껴졌다. 긴 시간을 내어 운동하러 다닐 수 없었지만 5~10분 짧은 시간이라도 체력을 위해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일하는 센터는 건물 12층에 있다. 나는 운전을 해서 회사로 출퇴근을 한다. 그래서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사무실로 올라 다녔다. 어느 날은 내가 근무하는 층보다 한 층 아래 있는 병원에 예약을 해놓아 시간 맞춰 가려는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 점검을 하고 있어 다른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늘 엘리베이터를 사용했었는데 문득 ‘한 층 아래인데 그냥 걸어 내려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계단을 이용해 병원에 다녀왔다.
마침 계단 이용을 하면 운동도 되고 에너지 절약을 할 수 있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나도 지하주차장에서부터 12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보려는 결심을 했다. 어느 날,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처음에는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허벅지가 땅겨서 12층까지 올라가는데 몇 번을 쉬며 속으로 그만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는 고민을 10번은 넘게 했다. 그렇게 12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더니 3일 정도를 다리가 아파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래도 틈나는 대로 또다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제는 지하주차장에서 12층 사무실까지 올라가는데 한 번도 쉬지 않고 땀도 거의 나지 않은 상태로 가뿐히 계단을 오를 수 있다.
《마녀 체력》을 쓴 이영미 작가는 나처럼 저질체력을 가졌던 분이다. 편집자란 직업을 가졌기에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100여 권의 책을 만들었으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고혈압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지인들끼리의 지리산 여행에서 그 중 몇 명이 지리산에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체력이 안되어 산 아래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유능한 워킹맘이라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이 정말 무능력하게 느껴졌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영미 작가는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영미 씨의 체력을 극복하는 눈물나는 과정은 결국 새로운 경험으로 그녀를 이끌게 해 주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체력이 우선임을 강조한다. 육아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반드시 부모 먼저 마스크를 쓰고 아이의 마스크를 씌우라고 하죠. 당장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보다 엄마가 먼저 자신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아이도 주도적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육아는 체력이란 말이 실감난다. 특히 운동을 했던 엄마들을 보게 되면 아이들과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 감탄하게 된다. 물론 아이들 체력을 따라가기 쉽지 않지만 말이다. 엄마가 아이가 이뻐 보이지 않고, 아이가 하는 사소한 행동과 말에도 짜증이 난다면 자신의 체력을 돌아보아야 한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함께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게 클 수 있다. 아이를 위해 엄마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아이는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엄마인 내가 있어야 아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