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현금을 가지고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 생긴 동전은 천덕꾸러기 취급에 처치 곤란해서 집안 여기저기에 그냥 굴러다니기도 한다. 막상 모아보면 몇 천원 되기도 하는데 은행에 들고가서 바꿀 수고는 안하게 된다. 성당에서 헌금할 때 외에는 현금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 머지않아 현금 화폐 자체가 희귀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서울에 그림책 연수가 있어서 고속버스 티켓을 왕복으로 예매해두었다. 운전을 해서 가면 여행용 가방에 그림책을 수십권 넣어서 갔을텐데 어제 내린 폭설로 여기저기 날씨도 난감하고 대중교통 이용할 생각하니 무겁게 이고지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책을 최소한으로만 챙기면서 가방을 이것저것 바꾸고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두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겨우 시간 맞춰 고속버스를 탔다. 모바일 티켓을 찍고 내 좌석 번호에 앉았고 2시간 10분이 예상되는 거리라서 창밖을 한참 구경하다가 잠이 들었다 깼다가 했다. 창밖을 보니 눈이 참 많이도 내려서 가는 곳마다 하얀 풍경이었다. 고속터미널에 도착해서 교대역으로 가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카드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졌는데....
여기저기 아무리 들쑤셔봐도....
안보인다.
지갑이 안 보인다.
으아아아악~!!!
가방을 바꾸는 바람에 지갑을 놓고 온 것이다.
핸드폰에 카드 기능도 안해뒀는데 어떡하지?
강의 시간 전에 여유롭게 도착해서 파일도 열어보고 체크해야 하고 마음은 급한데 어쩌나.
아무리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라도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서울 올때는 고속버스가 고장나고 일정들이 꼬여서 애를 먹었는데 오늘 또 이렇게 황당한 상황을 마주했다. 왜 이러는거니 정말.
주머니가 여러 개인 가방이라 구석구석 계속 뒤졌다. 뭐라도 나오는 게 없으려나.
한 쪽에서 뭔가 잡히는 게 있다.
꺼내보니 며칠 전 착불로 시킨 택배를받아두라고 하면서 남편이 현금을 준 것이 들어있었다.
오~ 살았다!
천원 짜리와 만원 짜리가 섞여 무려 2만 6천원이나 된다.
이제 살았다!!
1회용 티켓을 발권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
이돈이면 밥도 먹을 수 있겠는데?
휴~
거지같은 기분이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아까는 점심생각도 안하고 그냥 굶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고 뭐라도 먹어야겠다. 주변 식당들도 눈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뭘 먹을까 하고 둘러보니 팥죽을 파는 한국적이고 고풍스런 카페같은 곳이 보였다. 여기다~! 팥을 좋아하는 팥순이 나야 나. 춥고 황폐해졌던 내 마음을 달달한 통단팥죽으로 달래주자. 카운터에서 주문하려는데 그 앞에 붙어있는 안내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읽어보니 네이버로 주문하면 가래떡을 주는 쿠폰을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리뷰같은거 써서 이벤트 음식 받거나 선물 받는 거 완전 좋아하는 사람 나야 나. 이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그 자리에서 네이버로 주문하기를 눌러 통단팥죽을 시키면서 가래떡 쿠폰 사용하기를 누르고 결제는 앱카드로 했다. 현금을 쓰지 않고 온라인 결제로 해결. 팥죽도 가래떡도 너무 맛있게 먹고 나왔다.
교대 역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아직도 여유 시간이 남아서 스타벅스에 들렀다. 받은 기프티콘이 몇 개 있어서 그중 하나를 사용해 말차라떼를 마셨다. 이것 또한 현금 지출없이 해결~강의장에 도착해서 무사히 오늘의 할 일을 해냈다.
하필 내가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 연수 담당자다. 빨리 벗어나고싶은 선생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일찍 끝내는 센스를 발휘했다. 강의장을 정리하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는데 맨손이 빨개지도록 눈덩이를 굴리며 눈사람을 만드느라 깔깔대는 두 학생이 보였다. 그저 청춘이 이쁘고 저런 천진함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그림책 테라피 연수에서도 선생님들께 계속 말씀드렸던 게 있다.
보통의 하루가 주는 행복을 소중하게 여길 것, 순간순간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며 살 것, 내가 뭘 할 때 행복한지를 계속 알아갈 것.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것.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터미널로 다시 갈때도 일회용 카드를 구입했고 보증금을 챙겨받았다. 그리하여 오늘 5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생겼다. 조만간 집에 있는 동전들을 다 끌어모아 은행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아주 진지하게 다짐했다.
버스 출발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아서 이번에는 터미널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다. 내게는 아직 남아있는 기프티콘이 많기에 아주 당당하게 커피와 케이크 세트를 주문해서 맛있게 먹으며 책을 읽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요즘 자꾸 빈구멍을 만드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되었다.
아까 삼성페이 교통카드 기능을 부랴부랴 설정해봤지만 뭔가 내가 미숙했는지 잘 되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너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거의 실물 카드를 잘 챙겨 들고 다니니 별로 필요성을 못느꼈는데 오늘처럼 결정적으로 지갑을 안가지고 나오는 상황이 되니 문명을 따르지 못하고 미개인처럼 지내고 있었던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스마트하고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정신차리자~!!!특히 가방 바꿀 때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확인하고 지갑도 잘 챙기기. 그리고 당장 삼성페이 기능 설정하기. 롸잇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