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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가비 Nov 27. 2024

[100-80] 이래도 나, 저래도 나야.

 여기저기 폭설이 내렸다. 내가 있는 곳은 폭설은 아니지만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대고 우박이 내렸다가 눈으로 바뀌었다가 해가 났다가 아주 변화무쌍한 하루를 보여주는 날씨였다. 겨울이 이렇게 요란하게 올 일인가.


 이제부터 춥다고~!!! 겨울 온다고~!!! 늬들 각오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알겠어 알겠어. 반가워, 겨울아.


 아침 운동을 다녀왔는데 요즘은 운동을 하고나면 활기가 생기는게 아니라 더 피곤한 컨디션이 된다. 야심차게 공복 운동하고 씻고 집에 와서 아점을 챙겨먹고 나면 금방 졸리기 시작한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걸까. 오후에는 딱히 바쁜 스케줄이 없으니 운동 다녀오면 일단 큰 할 일을 하고왔다는 안도감이 드는지 몸과 마음이 아주 늘어진다.


 서평써야 할 책도 있고 내일 있을 강의 자료도 마지막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오늘은 왜이리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지 모르겠다. 고정적으로 출근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백수 상태인데 왜이렇게 피곤한거야. 어차피 집중이 안될테니 그냥 낮잠을 잤다. 평소에는 낮잠자는 시간이 아깝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에라 모르겠다. 가끔은 그냥 게으르게 있어볼래.


 한숨자고 일어났더니 뭔가를 하고 싶어졌다 곧 12월이 될거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보자! 최근에 산 그림책과 스노볼이 너무 찰떡같이 어울려서 다시 읽으면서 충분히 감상한 후 캐롤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셨다. 나는 지구지킴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으면서 몇 년째 가지고 있는 촌스런 트리를 재활용한다. 꺼내서 이리저리 모양 잡고 설치해두니 레트로풍이라 정겹고 연말 느낌이 확 난다.


 11월도 끝이 보인다. 24년 연구년제를 보내고 있는 내게는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귀하디귀한 시간이다. 후회없이 잘 보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해보는데 느슨하게 조금은 게으르게, 그래서 편안하게 지내보고 싶다.

 

 SNS를 보고 있으면 사람 마음은 비슷하고 열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는 걸 요즘 많이 느낀다. 내가 예전에 다 경험하고 지나온 감정의 풍파와 마음의 시련을 지금 표현하고 있는 지인들을 보면서도 드는 생각이다. 발전하고 싶은 사람들의 특징이지.


 누구보다 성취지향적인 편이었다. 남편이 내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너는 왜그리 피곤하게 사느냐고,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이는 이유가 뭐냐고, 자기 자신을 좀 편하게 내버려두라고. 한동안은 반문했다. 그렇게 살면 뭐가 나아지는데? 그냥 제자리거나 도퇴되는거 아니야?


 몇 년을 그렇게 살아보니 남편 말을 들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나는 그냥 무난하고 평온한 일상이 너무 좋다. 안달복달하며 조바심내고 비교하며 좌절하고 뭔가를 이루고 싶어 들끓었다가 나 자신이 무능한 것 같아 열패감을 느끼는 그 모든 것들에 지쳐버렸다.


 2025트랜드 중에 '아보하'가 있더라. 아주 보통의 하루, 즉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행복을 절실히 느끼는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단순하고 별 일 없는 일상이 주는 안정감에서 번아웃된 마음을 조금씩 충전하고 있는 중이다. 내 마음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나를 다독이는 시간으로 채우고 있다.


 그동안 왜 그리 업그레이드 인간이 되려고 했을까. 뭐라도 스펙을 좀 쌓거나 능력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느라 가족과 시간도 많이 못 보내고 혼자 여기저기 많이도 쫒아다녔다. 어떤 때는 케어할 아이들도 없이 혼자 자유롭고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는 지인들을 보면서 심지어 나는 가족에게 발목이 묶여 있어 뭘 제대로 못하는거 아닌가 하는 구속감이 들기까지 했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는 것 같고,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자식 성적표때문에 자주 주눅드는 내 자신이 싫었다. 속으로 이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진짜 맞는 거구나, 나 혼자였다면 마음껏 날개 펴고 하고 싶은거 다 하러 다녔을텐데, 나 지금 이렇게 안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라는 못된 생각을 마구 하면서.


 참으로 어리석고 오만하고 이기적이었지. 그래서 이제는 매일 나에게 말해준다. "잘나지 못해도 괜찮다, 꼭 뭐가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남편이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아내고, 내 아이들에게 소중한 엄마다. 비교하지 말고 열등감 느끼지 말고 그냥 나로 살아가면 된다. 가족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이 표현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자. 내 인생은 가족과 함께일 때 더 의미 있다"라고.


  지난주에 친한 친구와 친언니같이 친밀한 동네 언니가 내게 김미경 강사의  유튜브 강의를 꼭 보라고 했다.(신간이 나왔더라. 예전 책들은 대부분 읽긴 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친밀한 두 사람이 권하니 안 볼 수가 없었다. 그중 마음에 진한 울림을 준 내용은 김미경의 어머니가 보여주신 삶의 태도와 자식들에게 한 말과 전해준 책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양장점을 하셨고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 거의 누워서 13년을 지내시며 10분마다 자세를 바꾸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있는 힘을 끌어모아 자식 다섯에게 각자 한 권씩 자필로 쓴 책을 남겨주셨단다. 듣고나니 과연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어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사는동안 인생 선배로, 부모로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전해주어야 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너무 멋진 말씀을 남기셨더라. 듣는데 정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새벽마다 일어나 노트에 이렇게 쓰셨단다. '남들이 한 부정적인 말, 자신없게 하는 말을 지우고 내가 나에 대한 긍정의 말, 성공의 말로 매일 아침 다시 썼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는데 이 얼마나 깊은 지혜와 자신을 위한 노력이 담긴 말인가. 자식들에게 책과 지우개를 선물하고 가신 너무나 훌륭한 어머니시다.


딸 넷을 낳고 구박받으면서, 양장점을 꾸려 돈을 버는 워킹맘이면서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삶이었을까. 힘들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것은 하지 않았을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매일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해온 자기만의 숭고한 의식이자 리추얼이었을 것이다.


 나도 지우개로 나쁜 것과 불안한 것을 지우며 내 하루를, 한달을, 일년을 계속해서 새로 써나갈 것이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을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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