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체리주를 마시고 우연하게

by 혜아

하여간 무엇이든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표면만 훑고 지나가는 방법은 도저히 모르겠다.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맥락은 없이 주어지는 의무감 같은 것에는 속도나 양이 기준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 언젠가부터 그것에 쫓기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다. 기쁨을 기계적으로 공유해야만 실감되는 기쁨이 진짜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리스본은, '적게 천천히'라는 생각으로 이 도시를 걷는다면 오히려 더 많은 걸 보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동네를 여러 번 가보면 느껴진다. 누군가 계속해서 만들어둔 것 같은 새로운 골목길들이 어서 빨리 길을 잃어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이미 지나온 곳의 경계선은 희미해지고 앞으로 펼쳐진 우회로는 희한하게 뒤틀려져 있다. 그러니 역시 도시의 사적인 매력은 잘못된 골목에 뒤뚱거리며 들어섰을 때 알게 되는 것이며 사실은 모든 것이 길을 잃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 같은 도시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저긴 뭐지? 하고 호기심이 이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 본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은 그렇게 우연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상 도밍고 성당도 그러했다.



아주 작은 술집 앞이었다. 입구 안을 들여다보니 겨우 한 사람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아담한 카운터 뒤로 커다란 체리주가 담긴 술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테이블도 의자도 없는 곳. 진지냐라고 불리는 이곳은 1840년부터 지금까지 185년간 같은 자리에서 체리주를 판매하고 있다. '진지냐'는 모렐로 체리라고 하는 품종을 브랜디에 절여 만든 달콤한 리큐르, 가격은 1샷에 1.55유로. 체리를 넣어드려? 말아? 하고 물어보는 직원에게 넣어줘요! 하고는 아담한 술잔을 받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카페인이 몸에 잘 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 몸은 알코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꽤 빨리 깨달은 덕에, 지금까지 살면서 소주라는 것을 마신 것은 한병이 될까 말까. 그런 내 손에 도수 23도의 브랜디 한잔이 쥐여졌다. 그러나 인간은 뭔가를 잘 모를 때 용감해지기도 하듯, 체리가 주는 달콤함에 깜빡 속아 작은 잔에 담긴 체리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컥벌컥 이래봐야 50ml 정도지만.


상호명 자체가 A GinJinha인 이 가게는 진지냐가 리스본에서 상업적으로 처음 팔리기 시작한 곳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도수 강한 술을 마셔왔는데 가장 클래식한 방식은 술집 앞에서 한 잔을 빠르게 서서 마시는 것이다. 의자나 테이블 없이 바에 기대어, 작은 잔에 채워진 도수 높은 술로 피로를 지우거나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는다. 고된 삶을 살아갔던 포르투갈 서민들의 술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아담하고 세속적인 술집이 성스러운 성 도밍고 성당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마지막 한 방울의 체리주까지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보니 평화로워 보이는 평범하고 오래된 건축물 안으로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가고 있다. 어떤 도시의 감각은 가끔 이런 상황에 구조화된다. 오기 전에는 알지 못했을 곳, 알지 못해서 가볼 생각조차 없었던 곳, 이름도 역사도 명확한 정보하나 없는 장소에 턱! 하고 존재하게 되었을 때.


1241년에 건립된 성 도밍고 성당은 오래전 포르투갈 왕실의 주요 의식이 거행되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 도시의 어디든 리스본 대지진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곳이 있을까. 도시가 파괴되면서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거의 소실될 뻔한 성당은 50년에 걸친 복원을 통해 재건되었지만 1959년 일어난 내부 화재로 다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가 담겨있거나 화려한 건축 양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작은 성당이 주는 압도감은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화재 당시 불에 그을렸던 흔적이 내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화재 후에 난 수많은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아픈 과거 따윈 하나도 없는 것처럼 모든 걸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버리는 게 아니라 상처조차 아름답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숨 쉴 때 들이시는 공기에 그런 힘이 느껴졌다.


어떤 장소에 가여움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질 수도 있었나.


가지런히 정렬된 의자 가장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에 마신 술의 알딸딸함이 올라오려면 조금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고작 체리주 50ml로 절여진 정어리처럼 취하는 사람도 있다.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체리주를 마시고 우연히 이곳으로 걸어오지 않았다면 이날은 어떤 시간이 기억에 남아있을까.


포르투갈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들으며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이 생각났다.


"종교적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정, 공동체, 감사, 초월 같은 개념들과의 규칙적이고 전례적인 만남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 힘으로 그런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런 개념들이 필요함을 기억시켜 주고, 그런 개념들을 매력적인 포장지에 싸서 제공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영혼의 가장 잘 잊어버리고, 가장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Church of São Domingos <Visit Lisboa>

*알랭드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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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