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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May 18. 2022

어버이날, 딸이 '오천만원'을 들고 왔다


한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있는 큰 애가 어버이날이라고 먼 걸음을 했다.

학교 앞 유명 빵집에서 사 온 휘낭시에를 골고루 맛 본 뒤였다. 큰 애가 가방을 뒤지더니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A4 용지를 접어 만든 봉투에는 커다란 하트가 달려 있었다. 큰 애는 분홍색 형광펜으로 곱게 색칠한 하트를 펄럭거리며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달아주며 비장하게 입술을 꽉 다물던 유치원 시절의 어린 딸이 떠올랐다.


남편과 내 손에 쥐어진 봉투에는 ‘오.천.만.원.’이 들어있었다.

오천 원권, 천 원권, 만 원권, 오만 원권 한 장씩을 접어서 오, 천, 만, 원이란 글자가 보이도록 붙여놓은 신문물이었다.

‘아이디어 좋은데,’ 했더니 이미 작년에 유행했던 거라며 웃는다.

“마지막 ‘원’은 천 원짜리로 해도 될 텐데.”

남편이 그 와중에도 딸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다.

“그래도 조금은 들어가야죠.”

생글거리는 딸에게서 다시 20여 년 전의 모습이 보였다.


계산이 끝났으니 나는 본격적으로 돈봉투 탐색에 들어갔다.

하트 구석구석을 들추는 나를 보며 큰애가 동생에게 말한다.

“역시 우리 엄마는 편지를 더 좋아해.”

“여기 있을 만도 한데” 포기하지 않고 봉투를 뒤집자 큰 애가 결론을 내린다.

“없어요.”

아쉬움에 봉투를 내려놓고 저녁을 차렸다.


큰 애가  학교로 돌아간 다음 날, 청소를 하다가 상다리에 눌려 있는 하트 봉투를 발견했다.

“아이고, 왜 여기 이러고 있니?”

급하게 봉투를 빼내 들자 하트가 덜렁거리면서 속을 드러냈다. 거기엔 큰 애가 곱게 써 내려간 편지가 있었다.

나중에 몰래 써 놓고 간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보이는 마법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 편지에는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요’가 가득했다.



이번 어버이날, 쇼핑몰에서 선물을 검색하다가 너무 달라진 세상을 만났다. 꽃 상잔가 보니 ‘용돈 상자’란다. 어떤 용돈 상자는 큰애가 들고 온 ‘오천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면 그 상자에는 얼마 큼의 돈을 넣어야 하는 것일까? 용돈 상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그 안의 돈을 세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니 ‘유행’이란 것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나와 취향이 비슷하신 듯하다. 선물로 화장품을 보냈더니 그 안의 어버이날 특별 비누꽃상자가 더 예쁘다고 좋아하신다. 찾아가 보니 내가 드린 비누꽃 상자가 어머니들 보물 진열 선반 위에서 손주들 사진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내년에는 작은 애도 ‘오.천.만.원.’을 준비한다고 하니 남편과 나는 점점 더 갑부가 되겠다.

나는 변함없이 편지 봉투를 뒤집어 대겠지?

내년 어버이날, 나는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을 찾아내고 하트 하나로 세상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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