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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May 29. 2022


한 달 넘게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바쁜 농사철에 농부들은 물까지 대느라 허리가 휜다.

햇빛은 온몸을 달구지만 근처에 개울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개울이 없는 농부들은 수도 요금을 걱정해야 한다.

"야채 값 비싸겠다."

내 말에 장을 보고 온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사람들은 야채 값에 놀랄 것이고 농부들은 수도 값에 지쳐갈 것이다.

"올해는 얼마나 더우려나?"

거실 한 편, 이제 내 차례인가? 에어컨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난 에어컨 바람을 싫어한다. 카페나 식당에 가면 에어컨 바람이 안 닿은 곳을 찾아 앉는다. 에어컨 바람을 많이 받은 날은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끙끙 몸살을 앓기도 한다. 사회생활할 때도 힘든 것 중 하나가 에어컨이었다. 리모컨을 쥔 자의 위세가 싫었다.

다행히 남편도 나처럼 에어컨 바람을 싫어한다. 너무 더우면 찬 물로 샤워를 하고 몇 시간을 또 버티고 만다. 그래서 우리 집 에어컨은 일 년에 몇 번 일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올 때랑 태풍이 오기 직전에야 눈을 뜬다.


작년 여름 이른 태풍이 올 때였다. 산 전체에 뜨거운 공기가 내려앉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습기와 더위가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창문으로 더운 공기가 들어 올 틈이 없나 육중한 몸을 밀어대고 있었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띠리링, 입을 연 에어컨이 가리킨 실내 온도는 38도였다. 아직은 뜨거운 바람을 뿜는 에어컨 앞에 서서 온도를 30도로 설정하는데 둘째가 흥얼거렸다.

"여름에는 18도, 겨울에는 30도."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추라는 소린가 의아했다. 우리 딸들도 나를 닮아 에어컨 바람을 안 좋아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달라졌나?

"온도 더 낮출까?"

"아뇨,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서요. 애들이 냉온풍기 온도를 여름에는 18도로 겨울에는 30도로 맞춰 놓았거든요."

"응? 그럼 여름엔 춥고 겨울엔 더운 거 아냐?"

"흐흐, 그래서 제가 여름에 담요 들고 다녔잖아요."

그러고 보니 우리 두 딸의 여름 필수품이 담요였다. 책을 두고 갈지언정 담요는 손에 꼭 들고 다녔다.

"참 희한하게 살죠?"

둘째가 엄마는 이해 못 할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그러니 봄이 오는지 겨울이 가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일에 쫓기고 마음에 쫓기다가 계절을 잊고 산 시간들이 길었다. 벚꽃 한 송이가 손에 내려앉을 때에야 봄이었구나, 놀랐던 시간들.


포항에 살 때였다. 아는 동생이 투덜거렸다.

"언니, 진우 아빠가 하도 답답하게 굴길래 철 좀 들어라, 했더니 뭐래는 줄 알아? 자기 매일 철 든대."

옆에 앉아 있던 진우 아빠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 맨날 철 든다니까."

무슨 소린지 몰라, 이미 웃고 있는 남편에게 물으니 진우 아빠의 일이 코일로 감아 놓은 철을 올려 포장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렀네, 매일 철 드네."

내 웃음소리 따라 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당에 앉아 어른들이 말하던 '철'을 떠올렸다. 개인 주택에 살고 나서야 꽃이 져야 꽃이 다시 핀다는 것을 보았고 그렇게 철이 바뀐다는 것을 알았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게 아닐까? 여름을 여름으로 느끼고 겨울을 겨울로 깨닫고.

여름이 여름 답지 못하면 식물들은 냉해를 입고 열매를 키우지 못한다. 겨울이 겨울 답지 못하면 식물들은 수많은 벌레들에게 이른 봄부터 살을 뜯겨야 한다. 이 순간의 더위를, 이 순간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철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수많은 유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숫자로 7월, 12월을 세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여름에 18도, 겨울에 30도 속에 산다면 세월은 그저 흐를 뿐 철은 오고 가지 못하고 가슴에, 몸에 스미지 못한다. 그래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볼 때마다 철이 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되새긴다. '세월 헛살았네, ' 하는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깨닫는다.


여름의 길목, 도시는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건물 속에서 버티기 위해선 에어컨이 필요하겠지. 때론 열 받는다고 에어컨 앞에 서서 몸도 식혀야겠지. 그런데 그때 잠시 실내온도를 올려보는 건 어떨까? 마음의 온도와 계절의 온도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지나가는 철에게 손을 내밀고 잠시 머물다 가라고 인사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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