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려 Oct 02. 2022

소용, 그  쓸모에 대하여

 

도자기 공방 선생님은 가마에서 터질 것만 같지 않다면 내가 만든 모든 기물들을 구워주신다.

선생님이 가마에서 나온 따끈한 그릇들을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기물들은 유약을 입혀 구워 나온 형태를 보고 실생활에서 써봐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어떻게 성형을 해야 좋을지 정형을 해야 좋을지 느끼게 되죠."


그러다 보니 가마에서 나온 그릇들 중에는 바닥이 깨진 것도 있고 찌그러진 것들도 많았다.

표지 사진 속에 있는 그릇은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릇으로써는 쓸모가 없다.

그릇의 밑바닥 둘레는 주저앉았다. 만들 때는 멀쩡했는데 밑바닥에 고인 물을 제대로 닦지 않아서 흙이 마르면서 내려앉은 것이다. 전(그릇 주둥이) 부분은 너무 좁아 물 한 모금 마시려면 목을 뒤쪽 허리까지 젖혀야 한다. 이미 좁게 성형한 전은 내 능력으로는 다시 넓힐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이 그릇이 좋다. 첫날 수업, 두 번째로 만든 것인데 그릇으로써의 쓸모는 없지만 그래서 더 '작품' 같다.

주저앉은 폼이 내 게으름 같기도 하고 내 엉덩이 같기도 하다. 좁은 주둥이는 내 마음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고 이젠 좀 큰 마음으로 살아보자 다짐하게도 한다.

남이 보기엔 쓸모가 없지만 나에겐 쓸모가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나는 그릇들이 장식장 속에서 먼지만 쌓이는 것이 싫었다. 엄마가 아끼시는 그릇들이었다. 어린 나는 의자까지 갖다 놓고 올라서서 그 그릇들을 꺼내 쓸모를 찾아주려고 했다.  

"답답하지? 예쁘게 음식 담고 놀까?"

그릇들과 대화까지 나누며 의자에서 내려오는데 엄마가 야단을 치셨다.

"갖다 놔. 깨지면 어떡하려고."

이미 인사까지 나눈 그릇들이 아쉬웠다. 난 엄마가 외출하실 때면 몰래 음식까지 담아 먹고 다시 장식장에 올려놓곤 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그릇은 쓰라고 있는 거지, 모셔 놓으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


결혼을 하고 그 생각을 실천했다. 물건에 종속되지 않겠다며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모셔 놓을 그릇들은 사지 않았다.

그런데 도자기를 빚으면서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물건들은 그 쓸모가 다 다르다.

그릇 하나만 보더라도 찻잔이 있고 접시가 있다. 물기가 많은 음식은 움푹한 그릇에 담아야 하고 생선은 평평한 접시에 담아야 한다. 아니면 생선 허리 휜다.

그리고 더 당연하게도 사람들마다 물건의 가치와 쓸모는 다르다. 나에게 쓰레기 같은 인형이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친구고 여행에서 주워 온 돌 하나가 나에겐 소중한 기억이지만 누군가에겐 정말 돌일 뿐이다. 나에게 '쓸모'란 단어의 폭이 지나치게 좁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단어를 넓은 의미에서 잘 쓰고 있을까? 오히려 그 단어 속에 갇혀버리고 생각을 그 틀 속에 맞추고 있는 건 아닐까?

왜? 편하니까. 쉬우니까.


중국어에 소(所)란 단어가 있다. 이 소(所) 자는 여러 가지로 활용되지만 내가 빠졌던 이 단어의 매력은 동사를 명사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얻다'라는 동사 득(得) 자에 붙이면 얻은 것, 바로 소득이 되고 알다라는 지(知) 자에 붙이면 아는 것, 아는 바가 된다.

소(所) 자가 쓰이는 단어는 우리나라 한자어에도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소용(所用 사용하는 것, 사용되는 것), 소원 (所願 원하는 것), 소신(所信 믿는 것, 믿음) 같은 것들이다.


중국에 살 때는 중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무 동사에나 소(所) 자를 붙여 써봤다. 물론 내가 쓸 수 있는 동사가 많진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단어들을 중국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소(所) 자에 푹 빠져 살던 어느 날이었다. 이 단어를 쓰면서 내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너 어디가'를 '네가 가는 곳은 어디야?'로

'나는 너를 믿어'를 '내가 믿는 것은 너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꿈인지 생신지, 누군가가 휘리릭 줄을 던져 내 발목을 묶어버렸다. 나는 쾅, 바닥에 넘어졌다. 돌아보니 소(所) 자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내가 쓰던 말이 나를 명사화시키고 그 틀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내 생각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타동사를 넘어서서 그 자리에 묶여버린 죄수가 된 것 같았다. 내 생각의 주체가 내가 아닌 소(所) 자가 되어버린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여담입니다만 중국어도 영어처럼 꼭 주어를 달고 다닙니다. 중국어 작문 시간에 한 학생이 한국 식으로 주어를 빼고 작문을 해왔습니다. 중국어 선생님이' 주어는 어딨냐?' 물었고 학생은 '다 내가 하는 일인데 왜 주어를 붙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 왈, '너는 왜 너 자신을 존중하지 않느냐? 이 문장은 다 틀린 거니까 주어를 붙여라.' 그 학생은 그 자리에서 주어 나 아(我)를 30개 넘게 그려 넣어야 했습니다. 그 학생에게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


그 후 난 소(所)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싫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용'이란 단어가 싫었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을 둘째와 보고 있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참가자가 말했다.

"저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저 좀 많이 써 주세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참가자가 안타까웠다. 자신을 도구화시켜버린 그 참가자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어린 참가자의 탓일까?

사람들은 상대방에게서 쓸모를 찾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내가 어린 시절 가졌던 편협한 쓸모를. 그 쓸모는 다시 돈으로 환산되고 있다.

그리고 무서워졌다. 민며느리 같은 조혼 제도처럼 점점 나이가 어려지는 연예계 풍속도가....


다시 나의 도자기로 돌아와서 한자어 '소용(所用)'을 생각해본다. 나와 엄마의 '소용이 있다와 없다'는 그 의미가 달랐을 것이다. 어린 나는 직접 써야 소용이 있는 것이었고 엄마는 그 그릇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용이 있는 것이었다. 내 못난이 종지처럼.


하지만 여전히 '소용'이란 단어를 '쓸모', '쓰임'이란 단어를 사람에게 쓰는 것은 싫다. 아니, 써서는 안 된다. 무의식적으로 뱉는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은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말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바보라는 말을 매일 듣고 살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이상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피동형도 사람이 아닌 물건에만 써야 한다.

쓰이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어야 하고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디션의 그 참가자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저 많은 것을 할 줄 알아요. 전 잘할 수 있어요."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원래 이게 맞는 거다. 사람은 사람으로 서 있어야 한다.


소용(所用)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싫어요 전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라

쓸 줄 아는 사람이 될래요


그릇도 쓰고

돈도 쓰고

글도 쓸 줄 아는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전 싫어요

누구한테 쓰이는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가 소중한 걸요


내 두발로 걷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입으로 노래하는



세상 속에 갇힌 내가 아니라

세상 넘어 사는 내가 될래요


      - 소려의 못된 시 '소용, 그 쓸모에 대하여'

이전 12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