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이 동네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는 '버스 종점'이라는 곳에 처음 가봤다.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기껏해야 서울의 위성도시에서만 살아봤던 나에게 버스란 늘 번화가에서 타서 번화가에서 내리는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시내버스도 아닌 아주 작은 마을버스가 시골 동네 한복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퍽 낯설었다.
버스 종점이 있는 곳은 단연 동네 최고의 번화가였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집이 있는 곳이 '깡시골'이라면 종점 근처는 그냥 '시골'이었다. 종점 앞에는 작은 편의점도 있고 통닭집도 있으니까. 동네 곳곳을 다니는 마을버스가 한 곳에 모이는 만큼, 편의시설이 조금은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버스 종점을 좋아하게 되었다.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교통
사실 우리 동네의 대중교통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종점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하루에 딱 3대 다녔다. 그 버스를 타고 3km 떨어진 버스 종점에 가면, 2시간에 한 번씩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약 7km를 달려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서울로 가는 지하철을 40분에 한 대씩 만날 수 있었다. 마을버스에서 다시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역에 도착해 무사히 도시까지 가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이다. 차로 1시간 거리를 3~4시간에 걸쳐 이동해야 하는 셈이니까.
그러나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의 수를 세어보면, 하루에 3번이라도 운행해 주는 게 감사할 일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게 적은 승객으로 수익이 날 리가 만무했다. 정류장과 정류장 사이의 거리가 1km씩 되는데 손님이 이렇게 적게 타면, 버스를 운행하는 기름값이 더 들지 않을까? 이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교통은 분명 주민 복지의 일환으로 힘겹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나마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하루에 3대라도 마을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는 아예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3km 넘는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감히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인도가 있기는커녕,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아서 자칫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버스를 볼 일이 너무 드물다 보니, 우연히 지나가다가 버스를 마주치면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하곤 한다. "버스다! 빨리 소원 빌어!" 하루에 세 대 다니는 버스를 우연히 마주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버스보다는 트랙터를 더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 산책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농기계 통행금지'.
깡시골을 유영하는 히치하이커
이곳에서는 한쪽 손을 내밀어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는 히치하이커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위험하게 남의 차에 덥석 타면 어쩌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대중교통이 없는 시골에는 아직도 이런 문화가 남아있다. 어차피 택시를 불러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급하게 차 없이 나갈 일이 생기면 버스 종점까지만이라도 차를 얻어 타야 한다.
특히 면허가 없는 청소년들이 히치하이킹을 하는 경우가 잦다. 나 역시 청소년기에는 종종 동네 사람들의 차를 얻어타곤 했다. 이 동네 사람이라면 서로의 고충을 알기 때문에 선뜻 태워주는 경우가 흔하다. 굳이 손을 내밀어 차를 잡지 않고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어도, 먼저 차를 세워 "태워드릴까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종점 가세요? 저도 그쪽 방향으로 가는데!"도 이 동네의 단골 멘트다.
그냥 면허를 따면 될 텐데
물론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가구당 차량 2대 이상을 가지고 있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운전면허를 딴 뒤 작은 경차라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우리 동네 사람들은 미국인들과 비슷한 생활 방식을 갖고 있어서, 어딜 가든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걸 기본값으로 생각한다.
반면 나는 아직도 면허가 없다.우리 언니는 나를 '아가리면허러'라고 부른다.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면허를 따야지, 따야지 노래를 불렀지만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다. 실제로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모두 면허를 갖고 있다. 이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면허를 따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이십 대 중반이 넘도록 무면허로 사는 나는 굉장히 희귀한 사례다.
하지만 내가 '아가리면허러'가 된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 동네는 그리 운전이 수월한 곳이 아니다. 잘 닦인 도시의 도로와는 다르게 비포장도로도 많은 데다, 구불구불 시골길 천지다. 교행이 되는 길이 드물고 좁은 길 바로 옆에 개울이 흐르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살면서 도랑에 틀어박힌 차를 정말 많이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내 미래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오늘은 외박입니다
대중교통도, 택시도 없어서 불편함을 겪는 건 나 같은 무면허 인간뿐이 아니다. 대중교통이나 택시가 없다는 건 대리운전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를 집까지 몰아주고 나면 어쨌거나 기사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동네에서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대체로 외박을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데리러 올 사람이 있지 않는 이상, 술을 마신 곳에서 자고 와야 한다. 어차피 술집이 그리 많지도 않고 그마저도 늦게까지 여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게 보편적이다.
나야 동네 친구가 별로 없으니 외박할 일도 없지만, '핵인싸'인 우리 아빠는 종종 동네 모임에 나갔다가 친구 집에서 주무시곤 한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 어른들은 저마다 집에 손님용 이불을 하나씩 갖고 있는 듯하다. 여유가 있다면 아예 손님용 별채를 짓는 경우도 있다.
이런 동네에서 지금까지 무면허 인간으로 살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파워 집순이라는 점일 것이다. 나는 매일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도시로 나갈 일이 그리 잦지 않다. 출장이 있을 때는 아빠나 언니의 출근 차를 얻어 타고 도시로 나가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족들의 스케줄에 맞춰 이동하는 게 불편하기도 하지만, 외출의 불편함보다는 집에 머무는 시간의 행복함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리 개의치 않게 되었다.
이 동네의 풍경은 10년을 넘게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늘 새로운 구름이 뜨고 늘 새로운 노을이 지는 탓일까? 비록 마을버스조차 탈 수 없어도, 택시를 부르는 게 불가능해도 나는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동네를 사랑한다. 이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면허를 따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