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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스물여섯, 직업은 다섯 개입니다

by 송혜교


브런치북 인기순위 1위에 오르던 날, 잔뜩 신이 나서 이제부터는 브런치에 매일 글을 올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일주일에 글 한 편을 올리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약간의 해명을 해보자면, 지난 2주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보름이었다.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자니 브런치에 매일같이 글을 올릴 수 있던 날들이 그리워졌다.




몸은 하나인데 직업은 다섯 개


나는 지난 2주 동안 두 개의 강연 자료를 제작하고 두 건의 중요한 업무 미팅을 진행한 다음, 두 건의 회의와 한 건의 인터뷰에 참여했다. 주말에는 행사를 한 건 주최하고 외국에서 온 친구를 맞이한 뒤 전라남도까지 출강을 다녀왔다. 중간중간 칼럼 원고를 작성하고 운동을 가거나 공부하는 건 매일 반복하는 당연한 일과이니,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어느새 침대에 쓰러져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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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런 내 삶을 들여다본다면, 번잡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일에 진득하게 매달리기는커녕 하루에도 몇 개의 분야를 넘나들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나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이며, 강연자이자 정책가이고 사회단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조금 더 자잘하게는 직접 행사와 콘텐츠를 기획하고 추진하거나 디자인, 영상편집에 직접 뛰어드는 게 나의 일이다. 원래 비영리활동을 이끈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는 일'이니까. 이 모든 것을 대체로 방 안에서, 동시에 해내는 게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일과인 셈이다.




독립영화의 비하인드씬


9시부터 6시까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삶을 궁금해한 적 있다. 특히 '학부생 시절부터 시작해 평생에 걸쳐 전문성을 쌓아가는 직업'을 향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N잡러이자 프리랜서로 사는 삶이 꽤 버겁다는 걸 느낄 때일수록,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 더더욱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가 커리어로 인한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몇 년간 공무원을 꿈꿔왔던 친구가 의원면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모두에게 각자의 짐이 있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나 안정적인 소속감을 부러워하는 것은, 다른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내 영화의 비하인드씬과 비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셈이다. 나는 현재 독립영화의 비하인드씬을 지나는 중이다.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회에 자리를 잡으며 나 역시 그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고 내게 맞는 삶에 관한 확신도 덩달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한 가지 일에 내가 가진 전문성을 모두 투입하기보다는, 지금처럼 복잡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내 적성에 잘 맞는다는 확신.





자기복잡성이라는 요새


물론 소속의 사회로 대변되는 한국에서 무소속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용카드를 발급하거나 대출을 받는 것처럼 당연한 일조차도 버거워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를 자퇴한 뒤 줄곧 '무소속 인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프리랜서의 삶에 그럭저럭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의 삶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삶이 나의 자기복잡성을 끊임없이 길러주기 때문이다. 불안정하고 복잡한 삶이 나를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든다.


가끔 어린 나이부터 사회에 뛰어든 나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으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냐고. 나는 돌이켜보니 어렵지 않은 점이 없었고 여러 버전의 나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진로나 동기부여 특강을 할 때면 '자기복잡성'이라는 개념을 꼭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보다 중요한 건 별로 없다고. 자기복잡성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으며, 다양한 사건에 훨씬 유연하고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


자기복잡성이 직업에만 한정되어 발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은 나에게 자아를 표출하고 확립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글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날에도 내게는 강연자라는 정체성이 있고 몇 시간 거듭된 정책 회의에 지친 날에는 글쓰기가 나를 위로해 준다. 하나의 내가 무너져도 모든 게 무너지는 건 아니라는 것. 이 사실이 내게 언제나 큰 힘이 되어준다. 이러한 자기복잡성이 내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로 나는 복잡한 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내 이름 석 자로 살겠다는 다짐


내 이름 석 자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지켜내는 일은 제법 고되다. 가끔은 두 권의 책을 쓰고 수십 번의 강의를 다니고 수백 개의 영상을 만들고 수천 장의 카드뉴스를 디자인해 온 내가 기특하고도 안쓰럽다. 이 모든 일을 다 해내고도, 여전히 세상에 태어나 24년 하고도 다섯 달밖에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명함 한 장만으로는 나를 완전히 소개할 수 없는 삶. 삼성, 현대, SK 같은 엄청난 타이틀 대신 한 자 한 자 직접 눌러 적은 포트폴리오를 품고 사는 삶.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지만, 그래서인지 소속 없이 이룬 이 모든 발걸음과 성취가 더 애틋하고 귀하다.


'소중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약해진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사에 다정하고 애틋하게 구는 사람은 만사에 아프겠지만, 더 복잡하고 단단하게 이겨낼 수 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건강해진다. 내게는 내 다섯 개의 직업이 나를 받쳐주는 단단한 기둥인 셈이다. 스물여섯의 여름을 지나는 오늘, 다시 한번 이 소중한 사실을 되새겨본다. 삶의 한 구석이 무너져도,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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