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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ul 17. 2021

한 편의 웅장한 교향곡 같은: 전통 농향 안계 철관음

일운차당

일운차당 세 번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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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편의 웅장한 교향곡 같은: 전통 농향 안계 철관음





놀라운 사실을 하나 이야기해 봅시다. 영원히 10년 전처럼 느껴진다지만 1990년대는 이제 벌써 30년 전이라고 하네요.


전통 농향 안계 철관음 2021년 봄차. 차를 만든 스타일이 옛날이라 전통, 불을 오래 쐬어서 농향, 안계는 지역명이고 철관음은 차 이름입니다.


올해 막 나온 햇차이지만,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90년대 스타일로 진하게 오래오래 불기를 쐬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짙게 로스팅된 고전 스타일 농향은, 들어가는 공에 비해 맑게 만드는 청향이 유행인 현대 차 시장에서 값을 잘 쳐 주지 않아서, 만드는 사람도 점점 적어지고, 태우지 않고 좋은 불을 유지하며 만드는 기술도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하네요. 이 차는 그런 스타일로 일운차당에서 특별 주문 제작한 차입니다.


거의 탄 것처럼 보이는 진한 로스팅. 원래 초록색이던 찻잎을 70시간 정도 오랫동안 그슬려 만들었습니다.


중국 복건성 안계현에서 나는 철관음(鐵觀音)은 중국의 오래된 명차 가운데 하나입니다. 건륭제가 그 묵직한 향인 철과 같고 차엽의 모양은 관음보살의 손바닥과 같다고 해서 철관음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차농이 꿈에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고 찾은 차나무가 뭇 사람들의 병을 고쳐서 관음이라고 한다는 속설도 있고 그렇습니다. 명차라고 불리는 유명한 차일수록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붙이기를 좋아해서 여러 설이 있지요. 


어쨌든, '좋은 우롱차는 일곱 번 우려도 그 맛과 향이 처음과 같다(七泡有餘香)' 라는 말이 이 안계 철관음에서 나왔을 만큼 좋은 철관음은 그 자체로 마시는 맛이 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즘 유행을 타고 보통은 청향 철관음을 많이 맛보실 수 있는데요, 청향으로 푸릇푸릇하게 제다한 철관음은 차엽이 초록색, 차탕도 맑은 금황색을 띠고, 은은한 난향과 과일 향이 특징입니다. 


불이 이렇게 많이 들어간 농향 철관음은, 그 푸릇한 과일 향과 꽃 향을 불의 뉘앙스로 꾹 눌러 진득하고 고소하게 살려낸 맛이 있는데요,


탕색도 더욱 짙어져 진한 주홍빛입니다.


호를 한 번 물로 덥히고 찻잎을 넣어 온향(溫香)을 맡으면, 풍부하게 들어간 탄배에서부터 참기름처럼 고소한 향, 숯불 향, 그리고 꾸덕하게 말린 과일향이 진하게 솔솔 피어오릅니다. 처음 슬쩍 맡을 때는 불 향 위주이지만 숨을 뱉고 다시 한 번 깊이 들이쉬면 깊숙하고 상큼달큼한 향을 느낄 수 있어요.


한 포 우려내면 더욱 드러나기 시작하는 과편처럼 상큼달큼한 향. 차맛이 기대되는 특징 강하고 진한 향기여서, 마시기 전부터 두근두근거렸습니다.



탄배가 진하게 된 농향 차를 마실 때면 항상 떠올리게 되어요. 위스키와 같은 진한 뉘앙스. 그리고 이 쫀쫀한 밀도는 카라멜이나,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진하게 올린 휘핑 크림을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 너머로 배어나는 달고 진한 복숭아 향이라니, 비할 데가 없네요.


불이 오랜 시간 짙게 들어가 커피 같은 느낌의 첫맛도 있습니다. 진하고 고소한 커피에 크림이라니 아무래도 이건 아인슈페너죠. 아인슈페너를 입에 머금었을 때 입 안에 크림의 녹진함, 잘 볶아진 원두에서 나는 상큼달큼 씁쓸함이 가득 차는 듯한 뉘앙스. 단지 잎을 물에 우려낸 차일 뿐인데 밀도가 엄청납니다. 그런데도, 이 시원한 흐름은 초봄의 바람처럼 복사나무 가지 너머로 불어 가는 바람, 바람을 따라간 시선 너머 맑게 비치는 마을 풍경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네요. 마치 겨울날 눈처럼 두텁고 눈처럼 깨끗합니다.


앞은 두텁고, 뒤로 가면 맑아지는데, 맛이 사라진다기보다 불기의 뉘앙스가 깊숙하게 저 아래로 당기는 듯해요. 하도 깊숙해서 뜨겁지 않고 동굴 속처럼 차가운 불 향입니다. 물기 찬 시원한 불 향이 이끄는 대로 다다라 보면 안개가 도사리는 듯하는 끝맛에서 감로(甘露)가 서서히 가라앉아 혀끝에 맺힙니다.


새로 불을 쐰 차는 화기가 남아 있거나 아직 잡미가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이 차는 올해 새로 나오고 새로 불을 쐬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깨끗하고 편안하네요. 열기에 닿았을 때의 짙게 시작하는 전주부부터 크림 같은 농후한 첫 소절과 개운하고 쫀득한 과일 향, 맑고 깨끗하게 끝나는 마무리까지, 클래식으로 비하자면 아무래도 베토벤. 한 편의 웅장한 교향곡 같은 차입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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