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하 Sep 07. 2021

북유럽 현대 소설 속 한 장면: 타카이쥬에몬2019

교토 코쥬

안개가 짙게 낀 소나무 숲. 그 앞에 선 주택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불빛. 창 너머로는 무화과 케이크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린넨 커튼이 쳐진 창문은 빛으로 어른어른, 붉은색으로 찍힌 작은 꽃 무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싼 녹진한 안개. 문을 열면 보송하게 마른 집안이 환영해줄 것 같지만, 숲속 그림자에 짙게 드리운 어둠은 곧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코쥬(香十), 타카이쥬에몬(高井十右衛門) 2019.


새벽 이슬로 젖은 땅을 걸으면 발이 젖어들고, 그 신발 위에 집안에서 흐르는 불빛이 떨어져 빛나는, 신비하고 따스한 감각을 오묘하게 배합해 냈습니다.





코쥬(香十)는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황궁에서 향을 전담했던 관리인 야츠다 마타에몬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한 가문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대대로 황실에서 사용하는 향을 다루었으니 집안에 내려오는 지식이며 비전이 상당했겠지요.


그 중 8대, 타카이 쥬에몬(高井 十右衛門)이 천황에게 진상하는 향을 새롭게 배합하고 향에 관한 문헌을 정리하며 다도 세계에서도 활약하는 등,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어 이후로 코쥬의 가주는 쥬에몬(十右衛門)이라는 이름을 이어받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코쥬의 타카이쥬에몬(高井十右衛門) 시리즈는 그런, 가문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뒤에 붙은 연번은 그렇지만 또 최신 기술로 만들어낸 현대의 조향임을 나타내고요. 1575, 2018, 2019 세 종류가 있는데, 2019를 가장 먼저 소개드리지만 물론 1575가 '그때 그 시절의 향기' 를 지향할 것입니다.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것이, 오래된 향로에 피워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타카이쥬에몬(高井十右衛門)2019에는 침향, 팔로산토, 무화과가 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팔로산토와 침향의 결합이라니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을 붙여 놓으면, 녹진할 정도로 공기 중에 달라붙는 향 냄새가 몸을 잠그는 물처럼 차오릅니다. 조금 시원하고 산뜻한가 싶다가 그 위로 달콤한 무화과 향기가 섞이고, 보송하게 바람이 부는 듯하는 침향도 느껴져서 따스한가 싶다가도 도로 차가워집니다.


오묘한 배합은 향연이 그 모양을 정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나듯 서로서로를 감싸면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그 와중에 저는 안개 낀 소나무 숲 속 불빛이 흘러나오는 집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븐 안에서 무화과를 넣은 파운드 케이크가 구워지고, 때로 그 향기가 코끝을 스치지만 여전히 깊은 숲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소나무 향이 안개에 깃들어 몸을 감싸지요. 꼭 북유럽 현대 소설 속에 나올 것 같은 한 장면만 같아요.


이 향을 맡고 있으면 저도 이런 소설 속에 나올 법한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앉아 노곤하게 벽난로에 타는 불을 바라보는 기분도 들고, 또는 우리 집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이런 한 장면을 읽고 있는 듯한 여유로움도 느껴집니다. 신비하고도 편안하다. 타카이쥬에몬(高井十右衛門)2019의 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적' 이라는 게 무엇인가 싶어요. 나는 현대 사람이니,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현대 것이 아닌닐까요. 향아당의 무사시노 시리즈는 대놓고 현대를 지향하고, 제가 맡았을 때도 '현대적이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코쥬의 타카이쥬에몬(高井十右衛門)2019는 일부러 만들어진 '현대적' 인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다만, 요즘 향이라는 느낌입니다. 450년이 된 노포에서 만들 법한 향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또한 그런 긴 역사가 없으면 만들 수 없는 향 같아서 인상깊어요. 이건 완전 요즘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요즘 향이 아닌 것도 아닌 이 묘함이, 타카이쥬에몬이 이어져 오는 코쥬만의 현대가 이런 것일까 싶습니다.


어느 쪽이 좋으냐고 하면 저는 둘 다 좋은데, 섬세하게 지향된 현대와 역사 위에서 충실히 만들어 지금에 이른 현대를 비교해 보고 싶으시다면 두 시리즈를 모두 태워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욕 후 포근한 공기, 산사의 맑은 바람: 스자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