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향이 귀족들의 취미였던 시절에는 주인이 손님들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피운 향의 종류를 알아맞히거나 더 나아가서 각각의 향에 해당하는 시구를 읊으며 노는 놀이가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에 더 이상 향을 가지고 시를 읊는 귀족들의 우아한 살롱은 없지만, 또 온갖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향에서부터 작가의 마음을 흔드는 시상을 불러오지 못할 것도 없지요.
도쿄의 향아당(香雅堂)에서 기획한 '무사시노' 시리즈는 이렇게 예전부터 이어 오던 향과 문학, 지역과 문화의 만남을 다채롭게 펼쳐내는 향들입니다.
무사시노(武藏野, むさしの)란 도쿄 일대 간토 평야의 넓은 들판을 가리키는 일종의 지명으로, 현대에는 도쿄 일대 자체를 예스럽게 일컫는 느낌입니다. 과거 그 평야 자리에 있었던 무사시 국(武藏国)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니 그 자체로 과거의 시간을 불러와, 현재에 잇는 듯한 이름이네요.
무사시노 츠키카게(むさしの月かげ).
무사시노의 달빛, 무사시노의 달 그림자라는 이름인데요,
향 상자를 열어 보면 먼저 이 '무사시노' 시리즈에 대한 설명지가 있습니다.
도쿄국립신미술관과 콜라보하여 과거부터 현대의 도쿄를 이미지하는 시리즈로 특별히 기획되어서, 시간이 교차하는 컨셉에 맞게 전통 향료와 현대 향료를 배합해 총 네 가지의 '무사시노' 시리즈 향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각각의 향은 무사시노를 읊은 와카(和歌; 일본 전통 시가 형식 가운데 하나)에서 모티프를 따와 조향했는데, 무사시노 츠키카게(むさしの月かげ)는 헤이안-가마쿠라 시대 시인이자 대신인 쿠조 요시츠네(九条良経)가 읊은 구절로,
발 닫는 대로 걷다 보면 무사시노는 이토록 커다란 하늘 밑 들판에서 떠오르는 달 그림자
ゆくすゑはそらもひとつの むさし野にくさのはらより いつる月かけ
생각에 잠겨 무사시노의 들판을 걷다 보면, 문득 하늘은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처럼 이어진 듯 주변은 광막하고, 풀이 가득한 들판으로 떠오르는 둥근 달. 그 달빛을 올려다보는 시인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하는 한 수입니다.
무사시노 츠키카게의 주향은 백단과 자스민인데요, 그야말로 고독하고 아름다운 느낌이라고 하겠습니다. 백단에는 달콤한 향도 청량한 향도 같이 있는데 달콤함보다는 자스민과 만나 어쩐지, 제게는 드넓은 들판에 가득한 흰 억새꽃이 달빛 아래 스치며 흔들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향을 감상하는 일을 두고 '문향(聞香)'이라고 합니다. 향을 맡으려고 하거나 하나하나 나서서 뜯어보기보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들려오는 소리처럼, 어쩔 수 없이 듣게(聞) 되는 소리처럼 문득 느끼게 되는 향기. 그래서 향을 '듣는다' 라고도 할 수가 있겠는데요,
가만히 듣다 보면, 이 달빛은 달콤하고 따스한 것도 같습니다.
둥근 달은 환하고, 쿠조 요시츠네가 그 구절을 읊었던 예전에도, 바로 지금도 그 들판 위에서 모든 풀들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까요.
시간을 따라와 과거와 지금을 비추는 달빛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향 가게 이야기
도쿄 향아당(香雅堂).
교토의 오래된 향 가게, 야마다마츠 향목점(山田松香木店) 에서 독립한 차남이 1983년 개점한 가게라고 합니다.역사의향기 가득한 교토에서 현대의 도쿄로 그 자리를 옮기며,전통과 혁신이 함께하는 도시에서 일본의 향을 담아내겠다는 모토로 근 30여 년간 꾸려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소개드리는 무사시노 시리즈도 그런 가게의 방향성을 잘 담아내고 있는 기획이라고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