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는 계절의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울긋불긋하게 물든 산과 들이 가장 먼저라지만, 가을의 또 다른 얼굴이 있지요. 바로 멋진 날씨입니다.
늦여름의 더위도 지나가 문득 부는 바람이 시원할 때. 반소매 차림으로는 아침저녁이 슬쩍 쌀쌀하고, 낮 푸른 하늘은 무엇보다 드높고 아직까지 푸른 나뭇잎들도 물들지 않아 쾌청한 경치를 만들어낼 때. 옷차림이 아직 가볍고, 봄에 비하면 공기도 깨끗해 나들이를 가기에도 최적인 때. 바로 가을의 초입입니다. 그런 가을의 첫 바람을 이미지한 시 한 수와 향이 있어요.
무사시노 하츠카제(むさしの初風).
무사시노에 부는 첫 바람이라는 이름입니다.
푸른 빛깔 라벨에, 백단과 박하 조합이라고 써 있으니 패키지만 보아도 청량한 향이겠구나, 싶은데요,
테마가 된 와카를 찾아 보니 사이교 법사(西行; 헤이안 시대 승려이자 와카 시인)가 읊은 구절로
구슬처럼 늘어진 이슬 흩어 버리고 무사시노의 풀잎을 눌러쥐는 가을날 첫 바람
玉にぬく 露はこぼれて 武藏野の 草の葉むすぶ 秋の初風
풀잎에 구슬처럼 종종 늘어서 있는 이슬을 휭 하고 흩어 버리고, 풀이 우거진 들판(무사시노)을 꾹 눌러 불어 들에 무늬를 새기는 가을의 첫 바람. 서늘하게 그늘진 침엽수림 속을 거니는 듯 시원하고, 몸의 열이 식는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곧 푸른 하늘 아래 부는, 더위보다는 쌀쌀함을 처음 담기 시작한 가을 바람이네요.
무사시노 시리즈의 테마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인데, 무사시노 하츠카제는 정말로 전통 향료(백단, 감송, 안식향, 용뇌 등으로 보통 절에서 피우는 향이나 제사에서 피우는 향 같은 느낌)와 현대 향료(자스민, 페퍼민트, 라벤더 등 허브향과 여러 꽃향)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았구나 싶습니다. 저는 둘 중 고르라면 고민 없이언제나전통 향 파여서 소장하고 있는 컬렉션은 대부분 절간 향이거든요. 그런데 무사시노 하츠카제는 제 취향에도 맞는데다 전통 향의 어쩔 수 없는 무게감도 가뜬하게 덜어 놓았고, 이 정도면 트렌디한 카페에서도 디퓨저로 둘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향아당의 이 시리즈는 향연이 정석적으로 우아하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좋다 싶습니다. 마치 선향이라는 깃대 끝에 바람에 나부끼는 흰 깃발을 매달아 놓은 것 같아요.
시간을 타고 흐르며 서서히 섞이고 바뀌어 가는 흐름처럼, 가을의 첫 바람이 시원섭섭하게도 불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