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파란 하늘 아래 몸도 마음도 산뜻하게, 짐가방 하나 훌쩍 메고 떠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 가이드에서도, 그걸 보고 내가 여행 계획을 세울 때도 아무렇지 않게 맑은 날씨를 가정하지요. 그야 그런 편이 좋잖아요? 모처럼의 여행인걸요. 그래서 여행기들을 보면 날씨가 흐려서 아쉬웠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일정이 바뀌어서 아쉬웠다, 같은 말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여행지에서는 아무튼간에 날씨가 좋은 편이 좋습니다.
하지만 교토. 교토는 하루쯤은 비 오는 날을 반기면서 걸어 보세요. 흐린 하늘 아래 더 깊어 보이는 목조 건물의 그림자, 비에 젖어 반들거리는 돌길, 젖은 공기 안에서 마법처럼 반짝이는 신사의 붉은 등불. 비 오는 날에만 느낄 수 있는 오래된 도시의 정취가 있습니다.
사진 : 歲月之歌
그리고 훈옥당(薫玉堂). 매번 글 말미에 들어가던 향 가게 이야기를 여기서는 먼저 시작해 볼까요.
훈옥당(薫玉堂)은 1594년에 창업하여 현대까지 이어지는, 420여년의 역사를 지닌 교토의 향 가게입니다. 처음에는 교토의 오래된 절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필요한 약재를 유통하면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니 역사와 함께한 그 오랜 시간을 짐작해 볼 수가 있네요.
이런 오래된 가게들은 전통이 깊은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고, 그런데 현대까지도 장사를 이어 오고 있는 만큼 가게의 특징과 철학을 녹여내 세련되게 기획한 상품을 둘러보는 맛도 있습니다. 불을 이용해 태우게 되는 전통 방식 향뿐만 아니라 향낭, 향을 입힌 장식품, 편지지 등 각종 응용 상품들도 있습니다.
훈옥당은 전국 주요 사찰에 향을 납품하고 있고, 또 일반인을 위한 향 체험 교실을 운영하고도 있습니다. 오래된 가게들이 그렇듯, 단순한 '좋은 향기' 이상으로 문화를 녹여내어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작품으로서의 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훈옥당에서 '훈옥당의 향기' 라고 내세우는 대표적인 향이 바로 사카이마치101(堺町101)입니다. 향 설명을 보면 니시혼간지 거리의 정취(훈옥당은 니시혼간지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에 있습니다.), 훈옥당 매장 1층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온갖 향목들과 상품들이 은은하게 풍겨내는 향기 자체를 이미지했다고 합니다.
이 향에 불을 붙이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나 절의 향기, 오래된 책 향기 같다가, 그런 고건물 복도로 부는 서늘한 바람 같기도 합니다. 피워 놓고 문득 맡고 있으면 장미 같은 향도 납니다. 신선한 장미보다는 우아한 브랜드에서 내놓는 장미 향수 같습니다.
그러다가 제 상상을 이끈 것은 비 오는 교토, 산넨자카의 물에 젖은 언덕길입니다. 미묘하게 달콤한 듯도 하고 서늘한 듯도 한, 나무 냄새도 나고 어둡고 촉촉하고 아늑하기도 한 향기는 그 언덕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숨어 있는 것처럼 자리해 있는 교토의 어느 책방. 오래된 서적이며 옛날 문고본을 전기 등불 아래 늘어놓은 가게. 파우더리하게 부서지는 향은 문 밖으로 가느다랗게 내리는 빗줄기 같고, 그 책방의 문간에 서 있노라면 긴 역사를 마주하며 현재에 서 있는 복잡미묘한 추억의 정취를 느끼게 되겠지요.
사카이마치101(堺町101)은 훈옥당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조향법(향을 배합하여 만드는 일종의 레시피)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맡아 보면 절에서 쓸 것 같은 완전한 옛날 향기도 아니고, 현대적인 디자인과 깔끔한 포장처럼 세련된 마무리가 돋보입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고즈넉한 옛 거리, 비 오는 날의 책방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 아마 이 레시피도 맨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겠지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조향법을 따르면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나가 가게의 역사를 담았을 것입니다.
향 끝에 불을 붙이면, 세월을 거듭하여 과거와 지금이 혼재하는 오래된 시간이 말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