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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Oct 06. 2022

눈 속에 매화 향기 흐드러지고: 초매향

천 년 전 시인이 맡았던 향기를

2월 말, 매화가 피는 시기를 따라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낮에는 찻사발 감상 강좌를 듣고, 어쩌다 보니 그릇들도 좀 쇼핑을 해 버렸지요. 늘어난 짐에 굽이굽이 대중 교통을 이용해 숙소로 이동할 때 즈음에는 다들 녹초가 되어, 그냥 얼른 이 짐을 내려놓고 방에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참이었습니다.


달이 하늘에 하얗게 뜬 밤중이었어요. 아직까지 날은 다 풀리지 않아 차가운 기운이 맴돌고, 정원이 아름답다는 숙소까지 시골 길을 걸어올라가는 도중에 길 가에는 매화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아, 그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 커다란 매화 나무가 몇 그루나 우거져서 모든 가지가 밤 속에 한껏 하얀 꽃잎을 틔우고 있는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다들 힘든 것도 잊고 그만 자리에서 멈춰,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그 아래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화 향기는 어둠 속에서도 풍겨 오는 암향(暗香)이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그 날 매화는 달빛 아래 너무나 선명히 흐드러졌고 향기는 어둠이 아닌 그 모습 자체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효고 현, 매훈당(梅薫堂)에서 가게의 대표 향으로 내세우는 초매향(初梅香)은 아마도 그런 선명한 매화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매화에 관한 시를 한 수 볼까요. 송나라 대 시인 진여의(陳與義)의 5언 절구입니다. 



나그네 온 산의 눈을 밟고 가는데
향기 나는 곳이 곧 매화 핀 곳이로군
정녕 달 밝은 밤에
빗겨 있는 그림자 모습을 기억해 둔다네

客行滿山雪
香處是梅花
丁寧明月夜
記取影橫斜



달 밝은 밤, 새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나그네가 걷고 있습니다. 길 가로는 흰 매화가 흐드러졌으나, 밝은 달과 하얀 눈에 묻혀 눈이 매화인이 매화가 눈인지, 매화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 속에서도 풍겨 오는 향기가 있기에, 향기 나는 곳이 매화 핀 곳임을 알 수 있다는 아득하고 아름다운 모습.



초매향(初梅香)은 그런 향기를 닮았습니다. 백단, 침향, 사향을 조합해서 만든 향이라고 하는데, 먼저 상자를 열면 통상 백단이나 침향 같지 않은 산뜻하고 화려한 꽃 향기가 납니다. 불을 붙이기 이전부터 심상치 않은데, 피워 보면 그야말로 '아름답다' 고 할 만한 조향이 집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보통 전통 향에서 기대하는 절간 향 같은 것은 전혀 아닌, 화려하고 새초롬하게 빚어진 향긋한 꽃 향기. 첫인상은 마치 벚꽃 소금절임이나 과육이 젤리처럼 응결될 정도로 졸인 매실 절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쪽이나 졸이거나 절인 것을 보면 밀도는 빡빡하고요. 탄력이 있을 정도로 올을 밀어넣어 두텁게 짠 매끈매끈한 명주 같아요. 


이렇게 빡빡하지만 또 향이 퍼지는 인상은 널리 펼쳐지는 구름 같습니다. 밤의 매화 향기가 멀리멀리 퍼져 바다까지 가고, 그 바다에서 다시 소금 향을 실어와 부는 꽃과 소금의 향기. 그런가 하면 톤은 살짝 건조해서 구운 빵 냄새도 나고 그 바람에 잘 마른 겉옷 같기도 합니다. 침향의 단맛이 깊숙하게 깃들어 있는가 하면 상큼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시원할 때는 백단 기조의 산뜻하고 신선한 풀 향, 그리고 어딘가 매콤한 후추 향을 닮았습니다. 확실히 한 가지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향조입니다. 달고 매운 침향이 있는가 하면 시원하고 부드러운 백단이 받고, 그런데 그 부드러움에 이어지는 오일리한 머스크 향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새큼상큼한 인상은 여전해서 계속 맡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날 밤,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서 저는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나무 옆을, 아래를, 또 옆을 맴돌며 자꾸자꾸 매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향은 그런 밤중의 빠져들듯 수많은 매력을 가지고서, 가만히 맡고만 있어도 새록새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네요.


향 한 줄기로 그날의 밤 나들이가 떠오르다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또 바로 그 향으로 천 년 전 시인의 마음과 같은 매화 핀 밤을 상상할 수 있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는 여러분께 이 모든 심상을 전할 수 있으니, 참 멋진 일이 아니겠어요!





향 가게 이야기



매훈당의 시작은 1850년, 에도 시대 아와지시마(淡路島)에서 배를 가지고 물자 수송과 도매를 하던 일곱 집안 중 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도매 일을 겸하면서 부업으로 향을 제조하다가 이 중 몇몇 상품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고 4대째부터 향 만들기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매훈당' 이라는 상호가 등장한 것이 1926년이니, 그때로부터도 벌써 백여 년이 지난 오랜 가게인 셈입니다. 이런 매훈당에서 대를 거듭해 이어 오면서 개량된 비전(秘傳)이 바로 이 초매향(初梅香)이니, 가게를 대표하는 향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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