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매화 향기 흐드러지고: 초매향

천 년 전 시인이 맡았던 향기를

by 혜하

2월 말, 매화가 피는 시기를 따라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낮에는 찻사발 감상 강좌를 듣고, 어쩌다 보니 그릇들도 좀 쇼핑을 해 버렸지요. 늘어난 짐에 굽이굽이 대중 교통을 이용해 숙소로 이동할 때 즈음에는 다들 녹초가 되어, 그냥 얼른 이 짐을 내려놓고 방에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참이었습니다.


달이 하늘에 하얗게 뜬 밤중이었어요. 아직까지 날은 다 풀리지 않아 차가운 기운이 맴돌고, 정원이 아름답다는 숙소까지 시골 길을 걸어올라가는 도중에 길 가에는 매화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아, 그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 커다란 매화 나무가 몇 그루나 우거져서 모든 가지가 밤 속에 한껏 하얀 꽃잎을 틔우고 있는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다들 힘든 것도 잊고 그만 자리에서 멈춰,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그 아래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화 향기는 어둠 속에서도 풍겨 오는 암향(暗香)이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그 날 매화는 달빛 아래 너무나 선명히 흐드러졌고 향기는 어둠이 아닌 그 모습 자체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효고 현, 매훈당(梅薫堂)에서 가게의 대표 향으로 내세우는 초매향(初梅香)은 아마도 그런 선명한 매화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매화에 관한 시를 한 수 볼까요. 송나라 대 시인 진여의(陳與義)의 5언 절구입니다.



나그네 온 산의 눈을 밟고 가는데
향기 나는 곳이 곧 매화 핀 곳이로군
정녕 달 밝은 밤에
빗겨 있는 그림자 모습을 기억해 둔다네

客行滿山雪
香處是梅花
丁寧明月夜
記取影橫斜



달 밝은 밤, 새하얗게 눈이 덮인 산을 나그네가 걷고 있습니다. 길 가로는 흰 매화가 흐드러졌으나, 밝은 달과 하얀 눈에 묻혀 눈이 매화인이 매화가 눈인지, 매화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 속에서도 풍겨 오는 향기가 있기에, 향기 나는 곳이 매화 핀 곳임을 알 수 있다는 아득하고 아름다운 모습.


초매향2.jpg


초매향(初梅香)은 그런 향기를 닮았습니다. 백단, 침향, 사향을 조합해서 만든 향이라고 하는데, 먼저 상자를 열면 통상 백단이나 침향 같지 않은 산뜻하고 화려한 꽃 향기가 납니다. 불을 붙이기 이전부터 심상치 않은데, 피워 보면 그야말로 '아름답다' 고 할 만한 조향이 집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보통 전통 향에서 기대하는 절간 향 같은 것은 전혀 아닌, 화려하고 새초롬하게 빚어진 향긋한 꽃 향기. 첫인상은 마치 벚꽃 소금절임이나 과육이 젤리처럼 응결될 정도로 졸인 매실 절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쪽이나 졸이거나 절인 것을 보면 밀도는 빡빡하고요. 탄력이 있을 정도로 올을 밀어넣어 두텁게 짠 매끈매끈한 명주 같아요.


이렇게 빡빡하지만 또 향이 퍼지는 인상은 널리 펼쳐지는 구름 같습니다. 밤의 매화 향기가 멀리멀리 퍼져 바다까지 가고, 그 바다에서 다시 소금 향을 실어와 부는 꽃과 소금의 향기. 그런가 하면 톤은 살짝 건조해서 구운 빵 냄새도 나고 그 바람에 잘 마른 겉옷 같기도 합니다. 침향의 단맛이 깊숙하게 깃들어 있는가 하면 상큼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시원할 때는 백단 기조의 산뜻하고 신선한 풀 향, 그리고 어딘가 매콤한 후추 향을 닮았습니다. 확실히 한 가지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향조입니다. 달고 매운 침향이 있는가 하면 시원하고 부드러운 백단이 받고, 그런데 그 부드러움에 이어지는 오일리한 머스크 향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새큼상큼한 인상은 여전해서 계속 맡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초매향 3.jpg


그날 밤,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서 저는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나무 옆을, 아래를, 또 옆을 맴돌며 자꾸자꾸 매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향은 그런 밤중의 빠져들듯 수많은 매력을 가지고서, 가만히 맡고만 있어도 새록새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네요.


향 한 줄기로 그날의 밤 나들이가 떠오르다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또 바로 그 향으로 천 년 전 시인의 마음과 같은 매화 핀 밤을 상상할 수 있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는 여러분께 이 모든 심상을 전할 수 있으니, 참 멋진 일이 아니겠어요!





향 가게 이야기


매훈당.jpg


매훈당의 시작은 1850년, 에도 시대 아와지시마(淡路島)에서 배를 가지고 물자 수송과 도매를 하던 일곱 집안 중 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도매 일을 겸하면서 부업으로 향을 제조하다가 이 중 몇몇 상품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고 4대째부터 향 만들기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매훈당' 이라는 상호가 등장한 것이 1926년이니, 그때로부터도 벌써 백여 년이 지난 오랜 가게인 셈입니다. 이런 매훈당에서 대를 거듭해 이어 오면서 개량된 비전(秘傳)이 바로 이 초매향(初梅香)이니, 가게를 대표하는 향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keyword
이전 09화이슬을 흐트러뜨리는 가을 바람: 무사시노 하츠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