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진 Nov 08. 2021

<개똥철학> 고양이를 싫어하시나요?

35년 만에 풀린 오해

나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싫어했다기보다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고양이를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감정이 생겨난다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에서 비롯된다. 특히, 너무 싫거나, 너무 좋거나, 너무 두렵거나, 너무 기분 상하거나, 하는 감정 등은 내면의 신념 체계를 외부의 특정 대상에게 투영함으로써 생겨나는 감정이다. 나에게 ‘고양이’가 그랬다.     

      

어릴 때 잠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으로 맡겨졌다. 이름은 ‘희예’였다.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였는데 엄마의 반대가 심해, 마당이 있는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개를 무척 좋아했다. 맹목적으로 나를 좋아하던 느낌 때문이었을까.


고양이라는 존재는 처음이었는데, 개와는 다른 애교가 있었다. 특히 매끈한 발이 마음에 들었다. 바깥에서 키우는 개들의 발톱엔 언제나 흙이 묻어 있었는데, 고양이의 발은 언제나 부드럽고 깔끔했다. 발톱이 안으로 말려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희예를 안고 있으면, 가늘고 기다란 다리와 늘어지는 몸, 기분이 좋으면 그르렁그르렁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혀도 까칠까칠했다. 낯선 느낌이었지만, 나를 좋아하는 그 온순한 느낌만으로 개를 좋아했었기에 희예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희예의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반응에 깜짝 놀라는 일이 발생했다.  마루에 앉아 희예를 안고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을 때,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희예는 개의 등장에 놀라 손 쌀같이 나의 품을 빠져나갔다. 꼬리와 털을 예민하게 세우며 바람소리를 냈다.


나 역시 너무 놀랐다. 개에게서 희예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에 희예를 안으려고 하는 찰나, 희예가 내 팔을 할퀴고 빛의 속도로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다. 팔에서는 일자로 죽 할퀸 자국과 함께 피가 흘렀다. 억울하고 너무 화가 났다.


 ‘희예를 지켜주려고 했을 뿐인데, 나를 할퀴다니!’ 너무 괘씸해서 희예를 다시 친구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   




“고양이는 흥분하면, 꼬리를 세우고 등을 동그랗게 말아. 그럴 때는 절대로 건들면 안 돼”라고 친구는 말하며, 내 잘못이라고 했다. 그 이후, 천진하게 다리에 제 몸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희예의 모습에 나의 화도 금방 풀렸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부화장에서 4마리의 병아리가 집으로 오게 되었다. 노랗고 작고 뽀송뽀송한 병아리를 보는 순간, 너무 귀여워 손가락으로 살살 머리만 쓰다듬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작은 삐약이들을 상자에 넣어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나오는데,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렇게 놓고 가면 고양이가 잡아먹으니 단단히 넣어두고 가”     




     

“설마!” 하는 마음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상자를 굳게 닫아 옷장 속에 넣어 두고는 학교에 갔다. 병아리의 존재도, 희예의 존재도 모두 잊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방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그런데, 옷장 문이 훤히 열려 있었다. 상자 안 병아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감쪽같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야에 잡아 놓은 붕어를 발로 가로채 순식간에 해치울 때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는데,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희예를 본 순간, 화가 나는 것도 서러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순수 100% 두려움에 몸이 서늘해졌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살인범의 끔찍한 살인을 목격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다가오는 희예를 떨쳐내고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희예와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희예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리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두려움은 미움으로 변했다.  희예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먼 곳으로 데려가 돌아올 수 없는 곳에 버리기로 했다. 옆집 언니에게 부탁해 희예를 자루에 담아 내가 생각하기에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먼 곳이라 생각되는 곳까지 희예를 싣고 달렸다. 그리고, 논가에 희예의 자루를 내려놓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입구를 열어 준 다음, 자전거를 타고 재빨리 돌아왔다. 속이 너무 시원했다.          




아랫마을에서 한참을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맙소사!! 희예가 와 있었다. 그런데 희예의 눈빛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거리는 훨씬 멀어져 있었고,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섬뜩했다.     


희예는 그날 이후 나를 아주 멀리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려고 문밖을 나서면, 나무 위에 앉아 나를 보고 있거나 그러다 재빨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밤에는 나무 위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내 신발에 말라 버린 쥐꼬리와 뱀 껍질을 물어다 놓아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희예는 나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희예가 큰 개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고양이가 무서웠고, 고양이의 빛나는 눈이 특히나 무서웠다. 나를 노려 보는 것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늘리며 좁을 틈을 빠져나가는 모습, 벽을 타고 오르락 거리는 모습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30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양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고양이가 혜진 씨를 엄청나게 좋아했네요. 그거 미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보은’(은혜를 갚는 행동)이 예요. 일종의 예정 표현 같은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애정표현이었다니, ‘보은’이었다니!! 자전거를 타고 먼 곳에 자신을 버리고 온 주인에게 보인 희예의 마음이었다니!! 35년 만에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나와의 관계를 이어갔던 희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했다. 미안함을 표현할 수도 없는 세월이 야속했다.

     

“희예야. 미안해…”

     

본능대로 먹이사슬에 충실했던 희예를,  어린 마음에 단히 오해했었다. 오해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었다. 한밤중 길고양이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서워서 도망치곤 했다. 신기한 것은 오해가 풀리고 나니, 길고양이들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들의 몸짓도 전혀 달라 보였다. 고양이를 개와 비교했던 마음들도 사라졌다. 고양이가 고양이로 보였다.     



고양이가 고양이로 보인다는 말이 우스꽝스럽지만, 진짜 그랬다. 그동안 고양이를 보며 내가 본 것은 ‘고양이’라는 습성을 지닌 고유의 동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왜곡된 희예였다. 그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마음의 투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었다.    

  


비단, 고양이뿐이랴, 모든 것이 그랬다. 처음 이 회사에 왔을 때, 드넓게 펼쳐진 ‘풍경’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일상이 짜증 날 때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탁 트인 풍경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도 위로도 퇴색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대했던 이유, 언제라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렇다. 어제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으며, 내일도 볼 수 있다는 당연한 마음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사랑도, 물건도, 삶도 그렇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마음의 패턴에 물들지 않는 순수힌 공간 필요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hyehye314/7


작가의 이전글 8. 가난이 불행과 손을 잡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