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집안에 찾아들면,불행과 손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난은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머물다가 스쳐 지나간다. 마주하게 되는 것은 불행이 아닌, 가난이 머물다 간 흔적, 그리고 그것은 추억이 된다.
시골로 이사를 하면서부터는 어깨를 활짝 펴고 웃을 수 있었다. 여러 차례 전학을 했지만, 시골로 이사하고 나서야 친구가 생겼다. 무엇보다 산과 들, 작은 개울이 흐르는 동네가 너무 좋았다. 지금은 도시화하여 아파트와 백화점, 상점 등으로 번화했지만, 1986년도의 그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 이곳저곳에 분포된 보통의 시골이었다.
비가 내리면 논의 물이 범람하여 마당까지 차올랐다. 미꾸라지와 붕어가 마당 바닥의 풀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녔다. 나는 신이 나서 첨벙첨벙, 옷이 젖는지도 모르고 미꾸라지를 잡느라 온정신이 팔려버렸다. 봄이 되면, 다른 빛깔의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밤이 되면, 개구리들과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합창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느타리버섯 농장에서 일을 하며 재배를 배우다가, 대출을 받아 아랫마을 언덕에 땅을 빌렸다. 느타리버섯을 재배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비닐하우스 한 동을 따로 지어 살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새집이 탄생했다.
버섯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버섯을 수확하고, 마을 사람들이 와서 함께 포장도 하고, 처음엔 그럴싸하게 버섯 농사로 수입이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는 버섯의 종균이 잘 못 배양되어, 피땀 흘려 심은 버섯이 빨갛게 말라죽고 말았다. 처음부터 빚으로 시작했던 아버지의 농사는 어느 곳에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가난은 다시 극심해졌다. 버섯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밤중이면 쥐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그런 쥐를 향해 우당탕하고 돌진하는 고양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곳에서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은 돈 때문에 자주 싸우셨다. 생계와 채무 상환을 위해 일을 나가셨다. 다시 우리 4남매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스스로 밥을 챙겨 먹으며 우리끼리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모님은 한 살 차이 나는 언니에게 ‘우리가 없으면 부모 대신’이라며 양육의 일부를 전가했다. 그 책임을 짊어진 10대의 언니는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동생들에게 군림했다. 집안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하며 지시했다. 작지만, 거대한 공화국이었다.
엄마가 다른 집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매일 화를 냈다. 청소나 설거지, 집안에 미처 해 놓지 못한 것들을 우리에게 지적하며 화를 냈다. 그러다 기분이 더 안 좋은 날은, 설거지해 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동생을 제외하고 매를 맞아야 했다. 그때 나도 어렸고, 동생은 더 어렸고, 연년생인 언니도 어렸다. 설거지나 청소, 연탄불 갈기,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 널기 등을 자기 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가 시키는 일은 잘하는 편이었다. 처음 집안일을 돕기 시작한 건, 버섯 농사를 접은 직후였다. 엄마가 어느 농원에서 온종일 풀을 뽑는 일을 하고, 곱디곱던 피부가 빨갛게 타서 속상해하던 날이었다. 그날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지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ㅎㅎ)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 옆에서 물을 얼마만큼 넣는 건지 등을 물어보며 밥하는 법을 배웠다. 다음날, 엄마가 퇴근할 무렵 쌀을 씻고, 가르쳐 준 대로 손을 넣어 물을 맞췄다. 밥을 지으며 엄마가 오길 기다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칭찬해 주셨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은 밥을 짓고, 청소도 했다. 엄마는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밥이 정말 잘 되었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밥을 짓고 청소했지만, 엄마는 전처럼 기뻐하지 않으셨다.
점차 그 일은 나의 일이 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는 밥 먹은 설거지 역시 나의 일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그런 일들이 되어있지 않으면 엄마의 격한 잔소리와 분노의 회초리가 온 집안에 퍼지곤 했다. 엄마는 “엄마” 하고 부르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소리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어떤 소통도 하기 싫어했다. 언니에게 스프레이 병으로 맞은 날도, 선생님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날도 말할 곳이 없었다. 준비물이 필요하거나, 학교에서 소풍 가는 날이나, 가을 운동회가 있는 날에도 여전히 울면서 학교에 갔다.
“나를 팔아서 가져가.”
“소풍 가는데 돈이 왜 필요하냐. 그냥 가!”
“밥 먹었으면 됐지 뭘 더 먹으려고 하냐.”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첫 생리를 하던 날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배가 사르르 아프고 허리가 몽롱한 느낌으로 화장실에 갔다. 팬티에 조그맣게 묻어 나오는 혈흔을 발견했다. 너무 놀라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동네 사람들과 집 근처에서 일하고 계셨다. 내가 다가가자 엄마는 한번 힐끗 보더니, 귀찮다는 듯
“왜? 여기까지 왔어?"라고 묻고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셨다.
“엄마 나 생리가 나오는 것 같아”라고 첫 생리 사실을 알렸다. 마음엔 야릇한 설렘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엄마가 다시 나를 힐긋 보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지랄이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엄마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소리쳤다.
“보기 싫으니까 얼른 집에 가 있어!!”
내 안에서 느껴지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실감과 자괴감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걸어오며 생각했다.